불교의 세계관 역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초기 교리에서 불교의 세계관은 오온설(五蘊設)과 12처설(十二處設)인데 여기서 인식의 주체가 되는 여섯 개의 감각기관은 바로 인간존재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시작은 인간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문제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괴로움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며 절대적인 신에게 의존하는 나약한 죄인이 아니라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파악할 수 있고 자리이타의 삶을 구현할 수 있는 불성을 가진 존재인 것입니다.
또한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은 인간의 선성과 악성 등 깊은 성품까지도 설명하여 인간의 내용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유일신의 신앙에서는 이 세계를 절대의 신이 생성, 유지, 파괴한다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이 세계는 인간이 지은 업력(業力)에 의하여 생성하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불교는 바로 인간을 구하기 위한 인간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불(成佛)에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구원이란 궁극적으로 스스로 온갖 괴로움을 극복하고 열반에 이르는 것 즉 성불(成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한한 생명과 자유이상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서구의 종교는 초월신의 전지전능한 힘에 의지하여 이루려고 하는데 비해 불교는 근본적으로 초월신을 부정하고 인간의 생명 속에 내재된 불성을 발견하고 수행을 통하여 이를 구현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부처님은 신이나 구세주가 아니라 항상(恒常) 하는 진리에 눈 뜬 사람이며 깨친 사람일 뿐인 것입니다. 연기(緣起)의 진리는 부처님의 출세 이전에도 있었으며 이후에도 항상(恒常)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부처가 되고자 하는 성불의 종교인 것이며 따라서 불교는 부처와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서구의 종교는 완전하게 신에게 의탁하여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절대의 타력주의(他力主義)의 신앙인데 반하여 불교는 평등의 원리에 입각하여 자력에 의한 가장 합리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와 그렇지만 불교 또한 믿음의 종교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에서의 믿음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바탕위에서 설정된 합리적인 믿음입니다. 진리의 바탕위에 근거한 믿음이야 말로 맹신이나 미신이 아닌 올바른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과 더불어 올바른 실천, 즉 수행이 따라야 하는데 이것 또한 불교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다른 신앙에서 오로지 절대자의 선택이나 기도 또는 공희(供犧=공양으로 바치는 희생)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만 불교는 자신의 체계적인 수행에 의하여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번뇌로 인하여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가지가지의 괴로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르게 사는 것도 중생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도 지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지혜는 단순히 사물을 분별하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實相)을 바로 비추어 보는 참다운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지혜가 있다 할지라도 중생을 위한 자비가 없다면 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지혜와 더불어 자비의 실천이야 말로 진정한 종교로서의 불교가 가지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인간의 문제는 부처님이나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철저한 자력(自力)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불교는 밖으로부터의 메시지의 전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각(自覺)으로 출발합니다. 진리는 각자 스스로에 있고 의지할 곳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뿐인 것입니다.
팔십의 나이로 사라쌍수 아래서 입멸하기 직전 제자들에게 들려준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