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떠난 싯다르타는 다시 브라흐만(Brahman, 범천)과 해와 달과 불을 섬기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여기서도 싯다르타는 역시 자신이 닦을 만한 수행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이 이외에도 많은 스승을 찾아다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라문 여성 싸끼(Saki)와 바라문 여성 빠드마(Padma)의 은신처에 초대를 받았으며, 바라문 라이와따(Raivata) 성인과 뜨리만디까(Trimandika)의 아들 라자까(Rajaka)로부터 환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싯다르타의 구도 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까삘라왓투(Kapilavatthu)에서 동남쪽으로 약1,000리 거리에 위치한 베살리(Vesali,비사리성)에서는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싯다르타가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관(觀)하는 선정(禪定)’ 즉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이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당시 큰 나라였던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라자가하(Rajagaha, 왕사성)에 도착했습니다. 신흥의 도시 라자가하는 당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답게 수많은 사문들과 사상가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싯다르타는 그곳에서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라는 스승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웃다까 라마뿟다는 ‘상념(想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관(觀)하는 선정(禪定)’ 즉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는데, 싯다르타는 여기에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비상비비상처정’은 ‘무소유처정’보다 더욱 미묘한 선정의 경지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완전한 생사의 고통에서 해탈할 수 없다고 생각한 싯다르타는 또다시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베살리에서 헤어진 알라라 깔라마와 함께 웃다까 라마뿟따는 당시 가장 명망 높은 수행자들이었습니다. 선정(禪定), 즉 정신통일에 의해서 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정지되어 고요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수행 목적이었습니다. 선정(禪定)주의자 또는 수정(修定)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지도 아래, 싯다르타는 그들이 해탈의 경지라고 인정하는 최고 단계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모든 괴로움이 없는 완전한 경지는 아니었습니다.
싯다르타는 전통적인 수행자들로부터는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라자가하에서 남쪽으로 80㎞가량 떨어진 우루벨라(Uruvela)의 세나(Sena) 마을에 있는 네란자라(Neranjara) 강 근처의 숲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고행림(苦行林)으로 불리던 이곳은 현재의 부다가야(Bodhgaya) 동쪽이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고행수행을 겪은 싯다르타의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서 등과 배가 맞붙고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나는 비참한 몰골이었습니다. 이때 싯다르타는 고행으로써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지나치게 지쳐버린 육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네란자나강으로 내려가 맑은 물에 몸을 씻고 그때 마침 강가에서 우유를 짜고 있던 우루벨라의 촌장의 딸에게서 한 그릇의 우유죽를 받아 마셨습니다.
그리고 붓다가야의 우루벨라 마을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나무 아래 자리를 깔고 “내 만일 무상대도를 성취하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라는 굳은 결의를 하고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최후의 정려(靜慮)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마왕 파순의 방해를 물리치고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無上正得正覺)”를 이루었습니다. 이 때가 태자의 나이 35세가 되는 해 12월 8일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