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승불교의성립

부처님은 사람들의 근기(根器: 사람들 각자가 가진 성품에 따라 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것을 이해할 때도 개인에 따라 그 차이가 나타남을 말하는 것입니다.)를 살펴보아 그에게 알맞은 설법을 하였기 때문에 서로 다른 근기를 가진 사람들이 보았을 때 부처님의 설법은 많은 단편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처님의 법을 체계화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을 말해 주는 것이 아비달마 교학이었습니다.

부파불교의 이러한 아비달마 교학은 부처님의 근본교설(아함)을 체계화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처님의 교설을 아함에 한정시키고 어려운 해석으로 부처님이 설하신 법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고 무의미한 불교로 만들어 갔습니다. 또한 부파불교에서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무위열반’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이상적인 인간상은 그러한 열반을 얻는 아라한(阿羅漢)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이러한 부파불교의 인간상과 수행상은 전문적으로 수행을 하는 출가한 승려들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한 출가한 승려들로부터의 교화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재가 신도들은 부처님의 유골을 모신 불탑(佛塔)을 중심으로 모여 부처님에 대한 동경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출가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여 교단을 지켜 온 것과는 반대로, 불탑을 지켜온 재가 신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보다도 과거에 생존해 있던 부처님에 대한 동경을 신앙의 원천으로 삼아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부파불교가 어려운 수행과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로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을 때 여러 파로 갈라져 자파(自派)의 주장만이 최상의 것이라고 고집하여 온 불교의 자세를 맹렬히 비판하고, 재래불교를 소승(小乘:Hinayana)이라 폄하(貶下)하는 한편, 대승(大乘)이라고 칭하면서 이타적(利他的)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바로 대승불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대승’의 어원은 큰 수레, 즉 많은 사람을 구제하여 태우는 큰 수레라는 뜻으로,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제도(濟度)를 그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종래에 출가자만의 종교였던 불교를 널리 민중에게까지 개방하려는 재가자(在家者)를 포함한 진보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불교 유적인 스투파(stupa:墳墓)를 관리하고 있던 사람들이 중심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불교운동은 일체중생의 성불(成佛)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일체중생을 모두 보살로 보고, 자기만의 구제보다는 이타(利他)를 지향하는 보살의 역할을 그 이상(理想)으로 삼고 광범위한 활동을 펴 나갔습니다. 자신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남도 함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도를 지향하는 것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불(成佛)에 있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신 불교의 진정한 뜻이라고 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일어난 대승불교는 일반 재가 신도들을 포함하는 사상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았으며,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유마경 정토삼부경 등의 경전이 이루어져 종래의 불교를 일신하는 이 새로운 불교운동을 뒷받침하였습니다. 이 경전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대승이 불교의 중심세력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져 대승불교의 사상적 기반을 확립하였습니다.

대승불교는 중국의 한(漢)나라 때 건너와 몽골, 티베트 등 이른바 ‘북방불교(北方佛敎)’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우리나라에는 고구려 문자왕(文咨王:491∼518) 때 용수(龍樹)스님의 《중관론(中觀論)》등 삼론(三論)을 비롯한 천태(天台), 열반(涅槃) 등의 교법이 들어와 대승불교에 대한 연구 및 교화가 활발하게 전개 되었으며 삼론을 바탕으로 한 삼론종(三論宗)이 개종(開宗)하는 등의 한국에서의 대승불교는 독자적인 발전의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