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식사상(唯識思想)

유식학은 인도의 무착(無着:301-390년), 세친(世親:320-400)대사 등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인도 유식사상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경론으로는 해심밀경(解心密經), 입능가경(入楞伽經),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성유식론(成唯識論)등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유식이란 글자 그대로 오직 식(識)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마음뿐이고 외적사물은 식이 변하여 나타난 마음의 그림자라고 보는 것입니다(唯識所變). 우리들이 사물을 볼 때 눈앞에 있는 것이 실재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고정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에 의해 보이는 것, 주관과 객관의 관계로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유식의 의미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진여를 바탕으로 하여 마음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을 심상(心相)이라고 하는데 이 심상의 의식을 다음과 같이 팔식(八識)으로 구분하여 나타내고 있습니다.

1. 전오식(前五識)
전오식은 아래의 기본적인 다섯 가지 인식을 뜻합니다. 이들 오식(五識)은 육체상의 조직인 감각기관에 의하여 활동하며 그 의지처(根)가 다르고 인식의 대상(境)이 다를 뿐 여타의 성질은 거의 같습니다. 이 오식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오관(五官)을 통하여 객관계의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들로서 우리가 생활하면서 능히 체험할 수 있는 정신영역입니다. 그러나 이들 오식은 식별의 능력을 갖고 있기는 하나 그 대상의 오묘한 내용까지를 잘 관찰하여 선악의 구별과 가치를 정할 수 있는 능력은 부족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제육식인 의식(意識)이 가담하여야 만이 대상의 내용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① 안식(眼識) 눈에 의해 색을 구별하는 마음
② 이식(耳識) 귀에 의해 인식의 소리를 듣는 마음
③ 비식(鼻識) 코에 의해 냄새 맡는 마음
④ 설식(舌識) 혀에 의해 맛을 식별하는 마음
⑤ 신식(身識) 몸의 느낌에 의해 촉감을 식별하는 마음

2. 제육식(第六識)
의식(意識)이라고 하며 위 전 오식에 의지하여 인식작용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흔히 의식하고 사고(思考)하고 각종 정신작용에 사용하는 거의 모든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사고 작용의 대부분이 모두 제육식인 의식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의식은 전오식에 의하여 식별되는 대상을 다시 확인하여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현재와 과거에 생각하고 느꼈던 일들이나 잠을 잘 때 나타나는 꿈의 역할도 하며 의식에서 나타나는 모든 장애와 번뇌를 정화한 가운데 항상 안정하고 청정하게 나타나는 정신작용의 역할도 합니다.

이와 같이 의식(意識)은 물질과, 정신계 그리고 부정(不淨)과, 청정(淸淨)의 세계를 모두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고 증득하기 때문에 그 활동범위가 모든 심식(心識) 가운데서 가장 넓습니다. 그리하여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도 부릅니다.

3. 제칠식(第七識)

말나식(末那識)이라고 합니다. ‘말나(manas)’라는 말은 곧 의(意)라는 뜻으로서 이를 의역하면 사량(思量)의 뜻이 있습니다. 사량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각하고 ‘양탁(量度)’한다는 뜻도 있지만 항상 그릇되게 인식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어떤 진리를 인식할 때 항상 그릇되게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모든 감각이나 의식을 통괄하여 자기라는 의식을 낳게 하는 마음의 작용이며 객관의 사물을 자아로 여겨 모든 미망(迷妄)의 근원이 되는 잘못된 인식 작용을 갖게 하는 심식(心識)입니다.

또한 말나식은 여타의 식(識)보다 지속적으로 사량의 작용을 야기하여 사량식이라고도 합니다. 안식(眼識) 등 전5식은 사량하기는 하나 심세(審細)하게 사량하는 작용은 하지 못하며 제육의식(意識)은 심세(審細)한 사량심은 야기하나 그 심체의 의식작용이 가끔 단절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팔식 아라야식은 그 체성과 작용이 항상 지속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심세한 사량의 작용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나식은 지속과 심세한 사량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됨이 없이 모두 구족하여 아라야식과 같이 삼계를 윤회하는 도중이나 어떠한 극한 상황에 처할 때나 상관없이 항상 그 작용이 단절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량할 때도 아주 세밀하게 사량하는 심세(審細)의 뜻도 함께 지니고 있어 근본번뇌에 해당하는 사량(思量)의 작용을 추호도 단절됨이 없이 범부로서 삼계육도에 윤회하고 있는 동안은 항상 심세한 사량심을 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7말나식은 여타의 심식에 없는 조건을 다 구비하여 사량의 작용을 항상 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식이든 심식은 인식의 대상을 요하게 되는데 이 말나식은 아라야식을 인식의 대상으로 하여 사량하고 번뇌를 야기하게 되는데 세친대사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게송이 있습니다.

“다음의 제이능변(第二能變)인 이 식을 말나라고 이름한다(是識名末那). 말나식은 저 아라야식(阿賴耶識)에 의지하여 전변하고 저 아라야식을 다시 반연하여(依彼轉緣彼) 사량하는 것으로서 성과 상을 삼는다(思量爲性相).”

즉 말나식은 아라야식을 모체로 하여 그에 의지하여 독립되어 나타나며 자체의 기능을 능히 변전(變轉)하는 식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태(母胎)에서 아라야식이 능히 최초로 변화하여 인간의 모습을 갖출 때 이를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 하고 다음 아라야식에 의지하여 두 번째로 나타나 심식의 본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심식을 말나식이라 하며 이를 제이능변식(第二能變識)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아라야식에 의지하여 전생(轉生)해 가지고 다시 인식의 대상으로서 아라야식을 진정한 자아(自我)로 반연(緣彼)하여 사량하고 영원한 진리이며 중도(中道)의 경지에 있는 무아(無我)의 진리를 문득 망각하고 전도심(顚倒心)을 야기하여 인간의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항상 아치(我痴)와 아견(我見)과 아만(我慢)과 아애(我愛) 등 4가지 번뇌(四煩惱)를 주야로 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번뇌의 근원을 이 말나식에 두고 있습니다.

4. 제팔식(第八識)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합니다. 아뢰야식은 ‘alaya’의 음사(音寫)입니다. alaya에는 저장하는 곳 이라는 의미와, 집착의 대상이라는 의미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아뢰야식 속에는 모든 과거 행위의 영향이 종자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으므로 저장하는 곳 이라는 의미가 되며, 제7식인 말라식이 아뢰야식을 자아(自我)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집착의 대상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한편으로는 아뢰야식 속에 모든 종자(種子)가 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종자를 가진 것이라 하여 ‘일체종자식’이라고도 부릅니다.

아뢰야식은 매우 미세한 심층심리이기 때문에 일상의식으로는 그 활동을 지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온갖 인식의 행위를 훈습(薰習)하여 저장하는 작용을 하며, 미래의 업을 일으키는 행위의 씨앗을 형성합니다. 이처럼 아뢰야식은 모든 ‘업력종자’를 보존하면서 업력을 발동케 하여 현재와 미래에 모든 행위의 과보를 가져오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뢰야식 그 자체가 능히 번뇌를 야기하여 진여(眞如)를 집착하는 작용은 갖고 있지 않으며 동시에 제6식인 의식 등 전 7식이 조성한 종자를 능히 보존할지언정 아라야식 자체가 악업을 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아뢰야식은 고정적 실체가 아니라 찰나마다 멸하고 생하며 상속(相續)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렇듯 아뢰야식이 계속 활동하고 있는 한 우리는 생사를 반복하면서 계속 윤회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하고자 한다면 먼저 마음의 정화가 선행되어야 하며 자리이타의 보살행과 사성제와 팔정도 및 지속적인 십바라밀의 수행등을 통하여 중생의 유식을 청정한 진여본성으로 전환 시켜 부처님의 지혜를 증득하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