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20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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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1. 서품(序品)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기사굴산 안에서 큰 비구의 무리 1만 명과 함께 계셨다. 이들은 모두 아라한의 도를 얻었으니, 그 이름은 사리불, 대목건련, 수보리 등으로서 이와 같은 많은 아라한들이었다.

또한 보살마하살 2천 명이 함께 계셨으니, 그 이름은 해탈(解脫)보살, 심왕(心王)보살, 무주(無住)보살 등으로서 이와 같은 보살들이었다. 다시 장자 8만 명도 함께 계셨으니, 그 이름은 범행(梵行) 장자, 대범행(大梵行) 장자, 수제(樹提) 장자 등으로서 이와 같은 장자들이었다.

또한 하늘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의 사람인 듯 아닌 듯한[人非人] 60만억 무리가 있었다.

그 때 세존께서는 대중들에게 둘러싸여 일체의 대중을 위해 대승경전을 말씀하셨으니, 일미(一味) 진실(眞實) 무상(無相) 무생(無生) 결정(決定) 실제(實際) 본각(本覺) 이행(利行)이라 표현하셨다.

“만일 이 경전을 듣거나 네 구절의 게송만을 받아 지녀도 이 사람은 곧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서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할 수 있을 것이며, 일체 중생을 위한 위대한 선지식이 되리라.”

부처님께서는 이 경전을 말씀하신 뒤,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으셔서는 곧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들어가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셨다.

그 때 대중 가운데 아가타(阿伽佗)라 부르는 한 비구가 있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꿇어앉아서 이 대의를 거듭 밝히고자 게송으로 말하였다.

위대한 자비로 가득하신 우리 세존이시여,
지혜에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시고
중생을 널리 다 건지시려고
유일한 도리[一諦義]1)를 말씀하셨네.

모두 한맛의 도[대승]로써 설하시고
끝내 소승으로 설하지 않으시니
말씀하신 의미는
진실하지 않음을 여의셨네.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
참다운 실제(實際)를 결정하시사
듣는 사람은 모두 세간에 나와
해탈하지 않음이 없게 하셨네.

헤아릴 수 없는 일체의 보살들이
모두 중생을 제도하려고
대중을 위해 넓고 깊게 물어서
법의 고요한 모습[寂滅相]을 알고
결정된 곳에 들어가시네.

여래의 지혜와 방편으로써
마땅히 실제에 들어가도록 설하시니
모두 일승에 따르게 하시되
갖가지 뒤섞인 맛이 없구나.

마치 한 번 비가 적시면
온갖 풀이 번영하듯이
그 바탕에 따라 각기 다르나
한맛의 진리로 적셔
두루 일체에 충만케 하시네.

저 한 번의 비로 적시면
모두 보리(菩提)의 싹을 길러내듯이
금강의 맛에 들어가시어
법의 진실한 삼매를 증득하시고
결정코 의심과 뉘우침을 끊으시니
한 법의 표지[印]를 이루시었네.



2. 무상법품(無相法品)

그 때에 세존께서는 삼매로부터 일어나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는 참다운 법의 모습인 결정성(決定性)에 들어가기 때문에 방편과 신통이 모두 모습 없는[無相] 이익을 얻게 하느니라. 유일한 깨달음의 진리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모든 2승들이 알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부처님과 보살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니라. 제도할 수 있는 중생에게는 모두 한맛[一味]의 가르침을 설하느니라.

이 때에 해탈보살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정법(正法)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상법(像法)이 세상에 머무르는 어지러운 시대[末劫]에 사는 5탁의 중생들은 가지가지의 악업이 많아 3계를 윤회하며 벗어날 때가 없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부처님께서는 자비로 후세 중생을 위해 한맛의 결정적인 진실을 설하셔서 저 중생들이 함께 해탈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대는 내가 세상에 나온 원인을 물어서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며, 저 중생들이 세상에 나온 결과를 얻게 할 수 있다. 이 오직 하나뿐인 중대한 일[一大事]은 헤아릴 수 없으니, 위대한 사랑과 연민[大慈大悲] 때문이니라. 내가 만일 말하지 않는다면 즉시 인색함과 탐욕에 떨어지리니, 너희들은 한마음으로 자세히 들어라. 너희들을 위해 설하리라.

선남자여, 만일 중생을 교화한다면 교화한다는 생각도 없고, 교화함이 없다는 생각도 내지 않아야 그 교화가 더욱 클 것이니라.

저 중생들이 모두 대상과 주체[心我]5)라는 생각을 여의게 해야 하느니라. 일체의 대상과 주체는 본래 공적(空寂)한 것이니라. 만일 마음을 비울 수 있다면 마음은 허깨비처럼 변화[幻化]되지 아니할 것이며, 허깨[幻]도 없고 변화(變化)도 없으면 바로 생김[生]이 없는 법을 얻을 것이요, 생김이 없는 마음은 변화함이 없는 데 있느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중생의 마음의 바탕은 본래 공적합니다. 그 공적한 마음의 주체는 아무런 색깔이나 모양이 없는데 어떻게 닦아서 본래 공적한 마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부처님께서는 자비로 저희들을 위하여 말씀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일체의 마음의 모습은 본래 근본이 없으며, 본래 근본이 없는 곳은 공적하여 생김이 없느니라. 만일 마음에 생김이 없으면 바로 공적함에 들어가나니, 공적한 마음의 경지에서 바로 마음의 공함을 얻느니라. 선남자여, 모습[相]이 없는 마음에는 대상도 없고 주체도 없나니 일체의 법의 모습도 이와 같으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일체의 중생들이 주체에 사로잡혀 있거나 대상에 사로잡혀 있다면6) 어떠한 가르침으로 깨닫게 하여 저 중생들이 이 얽매임[縛 : 번뇌]에서 벗어나도록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만일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12인연을 관찰하게 하리라. 12인연은 본래 원인과 결과에서 발생한 것이며, 원인과 결과는 의식의 흐름[心行]7)에서 일어난 것이니라. 마음도 오히려 있지 않은데 하물며 몸이 있겠느냐? 만일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그에게는 있다는 견해를 없애게 할 것이요, 만일 주체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그에게는 없다는 견해를 없애게 하리라.

만일 대상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자라면 생김의 바탕[生性]8)을 소멸하게 하고, 만일 대상이 소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소멸의 바탕[滅性]9)을 소멸하게 하리라. 없애는 것이 바탕을 보는 것[見性]이요, 바로 실제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왜냐 하면 본래의 생김은 소멸하지 않고 본래의 없어짐은 생기지 않는 것이어서 소멸하지도 않고 생기지도 않으며,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나니, 일체의 모든 법도 이와 같으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중생이 법이 생기는 것을 보았을 때는 어떠한 견해를 없어지게 해야 하겠습니까? 법이 소멸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어떠한 견해를 없어지게 해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만일 어떤 중생이 법이 생기는 것을 보았을 때는 없다는 견해를 없어지게 하고, 법이 소멸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있다는 견해를 없어지게 하라. 만일 이러한 견해를 없어지게 한다면 법의 참다운 근원[法眞]10)을 얻으며, 결정된 바탕에 들어가는 일 없이 생김[生]이 없는 것을 결정하게 되리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 중생들이 생김이 없는 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생김이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생김이 없는 곳에 머무른다면 이것이 바로 생김이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머묾도 없고 생김도 없는 것이 바로 생김이 없는 것이니라. 보살이여, 만일 생김이 없는 것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생김으로 생기는 것을 없애려는 것이다. 생김과 소멸함이 함께 없어지면 본래의 생김은 발생하지 않느니라. 마음은 항상 공적하며, 공적함의 바탕은 머묾이 없나니, 마음에 머묾이 없는 것이 바로 생김이 없는 것이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마음에 머묾이 없다면 어떻게 수학(修學)할 것입니까? 배울 것이 있습니까, 배울 것이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생김이 없는 마음은 마음에 나고 드는 것[出入]이 없나니, 본래의 여래장(如來藏)은 바탕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배움이 있는 것[有學]도 아니고 배움이 없는 것[無學]도 아니니라. 배움과 배우지 않음이 있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배움이 없는 것[無學]이며, 배움이 있지 아니한 것으로 곧 배울 바를 삼느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여래장의 바탕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래장이란 생기고 소멸하는 분별 망상의 모습이 이법[理]을 가리워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이 여래장의 바탕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느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생기고 소멸하는 분별 망상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이법에는 옳고 그른 것이 없느니라. 만일 옳고 그른 것이 있다면, 바로 여러 가지의 생각이 발생하게 되느니라. 천 가지 생각 만 가지 분별이 생기고 소멸하는 모습이니라.

보살이여, 근본 바탕과 모습을 관찰할 적에는 이법이 저절로 만족하나니라. 천 가지 생각과 만 가지 분별은 도리에 유익하지 않으며, 부질없이 정신만 소란하게 하여 본래의 마음을 잃게 하느니라.

만일 생각하고 분별함[思慮]이 없으면 생기고 소멸함이 없어서 실답게 일어나지 않나니, 모든 식(識)이 안정되어 고요해지며, 식의 흐름이 생기지 않으며, 5법이 청정하게 되리니, 이것을 대승이라 하느니라.

보살이여, 5법이 청정한 데 들어가게 되면 마음에는 바로 망령됨이 없어지느니라. 만일 망령됨이 없어지면 여래의 스스로 깨달은 성스러운 지혜[聖智]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면 일체가 본래부터 생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며, 본래 생김이 없는 것을 알면 망령된 생각이 없어지느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망령된 생각이 없다는 것은 마땅히 그치고 쉬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망령된 생각은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니기에 쉬어야 할 망령이 없느니라. 마음에 주체적인 마음이 없음을 알면 그쳐야 할 마음이 없으므로 분별함이 없으며, 현재의 의식이 생기지 않으며, 그쳐야 할 생김도 없나니, 이것이 바로 그침이 없는 것[無止]이요, 또한 그침 없는 것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그침이면서도 그칠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그쳤으되 그칠 것이 없으나 그침이 바로 생기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 생김이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그치려 하는 것이 생기는 것이거니와, 이미 그치고 보면 그칠 것도 없느니라. 또한 그침이 없는 데도 머무르지 않으며, 머묾이 없는 데도 머무르지 않나니, 무엇을 생기는 것이라 하는가?”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생김이 없는 마음에 어찌 취하고 버릴 것이 있으며, 어떠한 법의 모습에 머무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생김이 없는 마음에는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느니라. 마음 아닌 데에 머무르며 법 아닌 데에 머무르는 것이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마음 아닌 데에 머무르고, 법 아닌 데에 머무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에 한 생각도 내지 않는 것이 마음 아닌 데에 머무르는 것이요, 법에 한 생각도 내지 않는 것이 법 아닌 것에 머무르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마음과 법에 생김이 일어나지 않으면 의지할 것이 없으며, 모든 의식의 흐름[行]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이 항상 공적하여 다른 모양이 없느니라. 예를 들자면 허공에는 움직임도 없고 머묾도 없으며, 일어남도 없고 만듦[爲]도 없으며, 저것도 없고 이것도 없는 것과 같으니라. 공한 마음의 눈 [空心眼]을 얻고 법의 공한 몸[法空身]을 얻어서 5음과 6입이 모두 공적하게 되리라.

선남자여, 공한 법을 닦는다는 것은 3계(界)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계상(戒相)에도 머무르지 아니한다. 청정하여 생각이 없으며, 끌어안을 것도 없고 놓아버릴 것도 없으며, 바탕이 금강과 같아서 3보(寶)를 부수어 버리지 아니하며, 마음을 비워서 움직이지 아니하지만 6바라밀(波羅蜜)을 갖추고 있느니라.”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6바라밀은 모두 모습[相]을 지니고 있거늘 모습을 지니고 있는 법이 세간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내가 설명한 6바라밀이란 모습이 없고 만듦[爲]이 없는 것이니라. 까닭이 무엇인가? 만일 사람이 욕심을 여읜 경계에 들어가면 마음이 항상 청정하며, 진실하게 방편을 말하여 본각의 이익으로 남들을 이롭게 하나니, 이것이 보시[檀]바라밀이니라.

의지와 생각[志念]11)이 견고하여 마음에 항상 머묾이 없고, 청정하여 물듦이 없으며, 3계에 집착하지 않나니, 이것이 지계[尸]바라밀이니라.

공(空)한 법을 닦아 번뇌를 끊어서 일체의 존재[諸有]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3업(業)을 적정하게 하여 몸과 마음에 머무르지 않으면, 이것이 인욕[ 提]바라밀이니라.

이름과 수효[名數]를 멀리 여의고, 공(空)과 유(有)의 견해를 끊어서 깊이 5음이 공함에 들어가면, 이것이 정진[毘梨耶]바라밀이니라.

공적함도 함께 여의고, 일체의 공함[空]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며, 마음이 머묾 없는 데에 있으나 크게 공함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면, 이것이 선정[禪]바라밀이니라.

마음에는 마음의 모습[相]이 없으며, 허공처럼 비움도 취하지 않는다. 모든 의지적 작용이 생기지도 않지만 적멸을 깨닫지도 않는다. 마음에 나가고 들어옴이 없이 바탕이 항상 평등하므로 가지가지 법의 실제(實際)는 모두 결정성(決定性)이다. 일체의 경지에 의지하지 않고 지혜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면, 이것이 지혜(智慧)바라밀이니라.

선남자여, 이 6바라밀은 모두 본각의 이익을 얻어서 결정성(決定性)에 들어가며, 초연하게 세간을 벗어나 걸림없이 해탈하느니라.

선남자여, 이러한 해탈법의 모습[解脫法相]은 모두 모습이 없는 의지적 작용이며, 또한 벗어남과 벗어나지 않음도 없나니, 이것을 해탈이라 하느니라. 왜냐 하면 해탈의 모습은 모습도 없고 의지적 작용도 없으며, 움직임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는 적정한 열반이며, 또한 열반이라는 모습도 취하지 않느니라.”

해탈보살이 이러한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일찍이 없던 가르침을 얻었다 생각하고, 그 뜻을 펼치고자 게송으로 말하였다.

큰 깨달음으로 만족하신 세존께서

중생을 위하여 법을 펼치시되

모두 1승법을 설하시니

2승의 길은 있을 수 없네.

한맛의 모습 없는 이익은

마치 허공보다 큰 것 같아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없건만

그 바탕이 각각 다름에 따라

모두 근본 자리를 얻게 하셨네.

저처럼 객체와 주체를 여의어

하나의 법으로 이루어 진 바

일체 존재[諸有]의 같고 다른 행위는

모두 본각의 이익을 얻어서

두 가지 모습의 견해 끊게 하셨네.

적정한 열반 또한

깨달음을 취하는데 머물지 않고

결정적인 경지에 들어가니

모습도 없고 의지적 작용도 없네.

마음을 비운 열반[寂滅]의 경지는

적멸한 마음도 생김이 없는 것,

저 금강의 바탕과 같아서

3보를 부수지 아니하고

6바라밀을 갖추어

일체의 중생들 제도하시네.

초연히 삼계를 벗어나게 하지만

모두 소승법으로 하지 않고

한맛의 법인(法印)인

1승으로 이룩하셨네.

그 때 대중들이 이 뜻을 설하는 것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대상[心]과 주체[我]라는 생각을 여의고, 공하여 모습[相] 없는 경지에 들어가니 광대하고 광활하였으며, 모두 결정성을 얻어서 오염된 번뇌를 남김없이 끊어 버렸다.



3. 무생행품(無生行品)

그 때 심왕(心王)보살은 부처님의 설법이 삼계의 밖으로 벗어나 헤아릴 수 없는 것임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모아 합장하고 게송으로 여쭈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은

세간을 벗어나 아무런 모습이 없고

일체의 중생들이

다 번뇌가 끝나게 하셨네.

결박을 끊고 대상과 주체를 비우게 되면

이것이 바로 생김이 없는 것

생김이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생김이 없는 법인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 때 부처님께서 심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생김이 없는 법인[無生法忍]의 가르침은 본래 생김이 없는 것이다. 모든 의식의 흐름은 생김이 없는 것이면서도 생김이 없는 의식의 흐름이 아니니라. 생김이 없는 법인을 얻었다면 곧 허망한 것이니라.”

심왕보살이 부처님께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생김이 없는 법인을 얻은 것이 곧 허망한 것이라 한다면 얻을 것도 없고 법인(法忍)도 없는 것은 허망하지 않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왜냐 하면 얻을 것도 없고 법인도 없다는 이것이 바로 얻을 것이 있는 것이니라. 얻을 것이 있고 법인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 생김이 있는 것이니라. 얻는다는 데서 생김을 지니게 되며, 얻게 되는 법을 지니므로 아울러 허망하게 되느니라.”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일러 법인도 없고 생김도 없는 마음이 허망한 것이 아니라 하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법인도 없고 생김도 없는 마음이란 마음에 형태나 단락(段落)이 없는 것이니, 마치 불의 바탕과 같은 것이니라. 불은 비록 나무 속에 있지만 그것은 결정된 바가 없는 바탕에 있는 것이므로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요, 바탕은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니라.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설명을 빌려서 이름으로 삼았지만 이름도 얻을 수 없듯이 마음의 모양도 그러하니라. 그 있는 데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니, 마음이 이러한 것인 줄 알면 이것이 바로 생김이 없는 마음이니라.

선남자여, 이 마음의 바탕과 모습은 또한 아마륵이란 과일[阿摩勒果]과 같아서 본래 스스로 생긴 것도 아니요, 다른 것을 따라서 생긴 것도 아니며, 함께 생긴 것도 아니요, 원인[因]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생김이 없는 것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끊임없이 새 것과 옛 것이 교체[代謝]하는 것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인연으로 일어나지만 생기는 것이 아니며, 인연으로 사라지지만 소멸하여지는 것도 아니니, 숨고 나타나는 것은 형상이 없는 것이니라. 근본적인 이치는 적멸하여 있을 수 없는 곳에 있으며, 머무르는 것도 볼 수 없나니, 결정성(決定性)이기 때문이니라.

이 결정된 바탕은 또한 동일한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요, 아주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늘 있는 것도 아니니라. 들어가는 것도 아니며 나오는 것도 아니요, 생기는 것도 아니며 소멸하는 것도 아니니라. 모두 네 가지의 비방[四謗]을 여의었고 말의 길이 끊어졌나니, 생김이 없는 마음의 바탕[心性]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무엇이 생김과 생기지 않음, 법인의 있음과 법인의 없음을 말하는 것인가?

만일 마음에 얻음이 있느니 머묾이 있느니, 또 그 이치를 보느니 하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지혜를 얻지 못하리니, 그것은 영원한 어둠이니라.

마음의 바탕[心性]을 요별(了別)하는 자는 마음의 바탕이 이와 같아서 바탕 또한 이와 같이 생김도 없고 행함도 없음을 아느니라.”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마음은 본래 행함에서 생기는 것이 아닐 것 같으면 모든 행함은 생김이 없을 것이며, 행함[行爲]을 일으키는 것도 생기지 않을 것이니 생기지도 않고 행함도 없는 것이 바로 생김이 없는 행함[無生行]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대는 생김이 없는 이치로 생김이 없는 행함을 깨달았느냐?”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아니옵니다. 왜냐 하면 만일 생김이 없는 행함이라면 바탕과 모습[性相]이 공적하여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얻을 수도 없고 잃을 것도 없으며, 말도 없고 해설도 없으며, 아는 것도 없고 모습도 없으며,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는 것일진대 어떻게 깨닫는다고 하겠습니까? 만일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면 쟁론(爭論)이 되리니, 다툴 것도 없고 논의할 것도 없는 것이 생김이 없는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바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보리의 바탕 속에는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으며, 깨달을 것도 없고 알 것도 없으며, 분별할 모습도 없습니다. 분별이 없는 속에서 청정한 바탕에 합일하나니, 그 바탕은 아무것도 혼합되어 있지 않고 말씀과 해설도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요, 아는 것도 아니며 모르는 것도 아니니, 가지가지의 본받아야 할 행함도 이와 같습니다. 왜냐 하면 일체의 본받아야 할 행함은 있는 곳을 볼 수 없으며, 결정성(決定性)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얻느니 얻지 못하느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그대가 말한 것처럼 일체의 마음의 흐름[心行]은 모습이 없으며, 주체는 고요하여 생김이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느니라.

지니고 있는13) 가지가지의 식(識)도 이와 같으니라. 왜냐 하면 눈과 눈의 감각은 다 공적한 것이며, 식도 공적하여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있을 수 없으며, 안으로 3수(受)가14) 없으니 3수가 적멸하느니라. 귀 코 혀 몸 마음 그리고 의식과 말나(末那)와 아리야식(阿梨耶識)도 역시 이와 같아서 모두 생기하지 않는 적멸한 마음이며, 생김이 없는 마음이니라.

만일 적멸한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김이 없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생김이 있는 행함이요, 생김이 없는 행함이 아니니라. 보살이여, 안으로 3수(受)와 3행(行)15)과 3계(戒)를 일으키느니라.

만일 이미 적멸하여 마음을 내었더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은 항상 적멸하여 성과[功]도 없고 쓰임[用]도 없으며, 적멸의 모습[寂滅相]도 깨닫지 못하고, 또한 깨달음이 없는 데도 머무르지 않느니라. 머물 곳이 없는 데 있을 수 있지만 언제까지나 모습 없음[無相]을 지니면 3수와 3행과 3계가 없으니, 모두 적멸하고 청정하여 머묾도 없느니라. 삼매에도 들어가지 아니하고 좌선(坐禪)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니 생김도 없고 행함도 없느니라.”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선(禪)은 능히 움직임을 섭수하여 가지가지의 허깨비와 어지러움을 안정시키거늘 어찌하여 선(禪)이라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선(禪)은 곧 움직임이니 움직이지도 않고 선(禪)이라 하지도 않는 것이 생김이 없는 선[無生禪]이니라. 선(禪)의 근본 바탕[本性]은 생김이 없는 것이니 생김을 여읜 선의 모습[禪相]이요, 선(禪)의 본성은 머묾이 없는 것이니 머묾을 여읜 선(禪)의 움직임이니라. 만일 선(禪)의 근본 바탕[本性]에 움직임[動]과 고요함[靜]이 없는 줄 안다면, 생김이 없음을 얻으리라. 생김이 없는 지혜는 또한 머무는 것에 의지하지 않으며 마음 역시 움직이지 않나니, 이러한 지혜 때문에 그러므로 생김이 없는 반야바라밀을 얻느니라.”

심왕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생김이 없는 지혜[無生般若]는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으므로 어디에서도 떠나지 않습니다. 마음에 머물 곳이 없으며, 처소가 없는 데에 마음을 머무르게 하여 머묾도 없고 마음도 없습니다. 마음이 생김 없이 머묾[心無生住], 이와 같이 머무는 마음이 바로 생김이 없는 머묾입니다.

세존이시여, 마음이 생김이 없이 머무르는 것은 헤아려 생각할 수 없는 것이거늘 헤아려 생각할 수 없는 가운데서 말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심왕보살은 이러한 말씀을 듣고 처음 있는 일이라 찬탄하면서 게송으로 여쭈었다.

큰 지혜 원만하신 세존께서

생김 없는 법을 널리 말씀하시네.

일찍이 듣지 못한 바를 듣게 하시니

아직 설하지 아니한 법 이제 말씀하시네.

마치 깨끗한 단 이슬이

때때로 한 번 나타나듯이

만나기도 어렵고 헤아리기도 어려운데,

듣는 것 역시 어려워라.

위없이 좋은 복전(福田)이요

최상의 미묘한 약(藥)이라.

널리 중생을 건지시려고

이제야 말씀을 펼치시었네.

그 때 대중 속에서 이러한 설법을 듣고, 모두 생김 없는 법과 생김 없는 반야를 얻게 되었다.



4. 본각리품(本覺利品)

그 때 무주(無住)보살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한맛이요 진실하며[一味眞實] 불가사의한 법을 듣고,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이르러 부처님의 자리로 다가가 한마음으로 자세히 듣고 청정한 경지에 들어가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부처님께서 무주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근본 없는 데서 왔다가 이제 근본 없는 데로 갑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본래 온 곳도 없으니 이제 갈 곳도 없느니라. 그대가 얻은 본각(本覺)의 이익은 헤아려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니라. 이것이 위대한 보살마하살이니라.”

그리고는 바로 큰 광명을 놓으시어 대천세계를 두루 비추시며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위대하도다, 보살이여.

지혜가 만족하고

항상 본각의 이익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구나.

가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본각의 이익에 머물며

가지가지 중생을 이끌어 주니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구나.

그 때 무주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이익으로 운전해야 중생의 일체의 정식(情識)을 변화시켜 아마라식[奄摩羅]에 들어가게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순일한 깨달음[一覺]으로 여러 가지 식(識)을 변화시켜 아마라식에 들어가게 하느니라. 왜냐 하면 일체 중생의 본각(本覺)은 항상 순일한 깨달음으로 가지가지의 중생을 깨우치며, 저 중생들이 모두 본각을 얻어서 가지가지의 정식(情識)들이 공적하여 생김이 없는 줄을 깨우치게 하느니라. 왜냐 하면 결정된 근본 바탕[本性]은 본래 움직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일체의 식(識)16)은 모두 경계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인데 어떻게 움직이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의 경계는 본래 공하며, 일체의 식도 본래 공하므로 공은 연고(緣故)가 없는 바탕[無緣性]이니라. 어떠한 인연으로 일어나는가?”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일체의 경계가 공하다면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게 되면 망상이 되느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존재[萬有]는 생김도 없고 형상도 없어서 본래 스스로 이름하지 않는 것이니 모두가 공적하며, 일체의 법(法)의 모습도 이러하며 일체 중생의 몸 또한 이와 같으니라. 몸도 오히려 존재하지 않거늘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일체의 경계가 공하고 일체의 몸이 공하며, 일체의 식이 공하고 깨달음 역시 공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순일한 깨달음이란 무너뜨릴 수 없고 부술 수도 없나니 결정성(決定性)이기 때문이니라. 공한 것도 아니요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은 것[空亦不空]도 아니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가지가지의 경계도 그러하여 공의 모습도 아니며 공의 모습 아닌 것도 아니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저 경계라 할 수 있는 것은 바탕이 본래 결정되어 있지만 결정된 바탕의 근본은 처소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깨달음도 이와 같아서 처소가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깨달음은 처소가 없기 때문에 청정하나니 청정하므로 깨달음이 없느니라. 사물은 처소가 없기 때문에 청정하나니 청정하므로 물질[色]이라 할 것도 없느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마음과 안식(眼識 : 눈의 분별)도 이와 같아서 헤아릴 수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과 안식도 이와 같아서 헤아릴 수 없느니라. 왜냐 하면 물질은 본래 처소가 없으므로 청정하여 이름할 것이 없으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라. 눈은 본래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보이는 것이 없으므로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니라. 마음은 본래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그침이 없으므로 일어날 곳이 없느니라. 식(識)은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으므로 인연의 차별이 있을 수 없느니라. 바탕은 모두 공적하며, 바탕은 깨달을 수 없나니, 법칙을 깨닫는 것으로 깨달음을 삼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깨달음 없는 여러 가지의 식(識)을 깨우쳐 알면 근본으로 들어가느니라. 왜냐 하면 금강석 같은 지혜[金剛智]의 경지에서는 해탈의 길[解脫道]이 끊어졌으며, 완전하게 끊어지면 머묾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 나오고 들어가는 것이 없느니라. 마음은 소재처가 없는 결정성의 경지에 있으며, 그 경지는 청정하기가 맑은 유리와 같고, 바탕은 항상 평등하기가 저 대지와 같으며, 깨달아 미묘한 관찰은 지혜의 햇빛과 같고, 이로움을 성취하고 본각(本覺)을 얻는 것은 위대한 진리의 비[法雨]와 같으니라. 이 지혜에 들어간 자는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며,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는 가지가지의 식(識)이 발생하지 않느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순일한 깨달음의 성스러운 힘과 네 가지 큰 지혜의 경지는 바로 일체 중생의 본각의 이익[本覺利]이 되겠습니다. 왜냐 하면 일체의 중생은 바로 이 몸 속에서 본래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중생은 본래부터 번뇌가 없으며, 가지가지 착함과 이익의 근본이지만 지금은 욕심의 가시[欲刺]를 지니고 있으므로 아직 항복시키지 못한 것이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만일 어떤 중생이 아직 본각의 이익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번뇌를 캐어 모으고 있다면 극복하기 어려운 그것들을 어떻게 항복시켜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혹 번뇌를 쌓거나 혹 홀로 행하되 대상을 분별하거나 번뇌에 물들더라도 그 정신을 돌리어 공한 동굴[空窟]에 머물게 하면 조복하기 어려운 것을 항복시키게 될 것이요, 마군의 속박에서 벗어나 초연히 명백하게 드러난 경지에 앉아 식음(識陰)17)이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느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마음으로 열반을 얻으면 홀로 뛰어나 필적할 것이 없이 항상 열반에 머무르게 되리니 그것을 마땅히 해탈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항상 열반에 머무르면 이것은 열반의 올가미니라. 왜냐 하면 열반이 바로 본각의 이익이며, 이로운 본각이 본래 열반이요, 열반의 깨달음의 성분(性分)이 바로 본각의 성분이기 때문이니라. 깨달음의 바탕은 다른 것이 아니므로 열반도 다름이 없다. 깨달음은 본래 생김이 없으므로 열반도 생김이 없다. 깨달음은 본래 사라짐이 없으므로 열반도 사라짐이 없다. 열반과 깨달음은 본래 다름이 없으므로 열반을 얻을 수 없나니, 열반을 얻을 수 없는데 어찌 머묾이 있다 하겠느냐. 선남자여, 깨달은 사람은 열반에 머무르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깨달음은 본래 생김이 없는 것이니 중생의 허물을 벗어나며, 깨달

음은 본래 공적함도 없으니 열반의 움직임을 벗어나는 것이니라. 이러한 경지에 머무르면 마음에 머무는 바가 없어서 나가고 들어감이 있을 수 없으며 아마라식에 들어가기 때문이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아마라식은 들어갈 곳이 있는 것이며, 곳[處]은 얻을 바가 있는 것이니, 이것은 법을 얻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왜냐 하면 비유하자면 어리석은 자식이 손에 금전(金錢)을 가지고도 지니고 있는 줄 모르고 시방(十方)으로 돌아다니며, 50년이 지나도록 가난과 고난으로 오직 구걸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으나18) 자신을 지탱하기도 부족했던 것과 같으니라. 그 아버지는 자식의 이러한 사정을 보고 자식에게 일러 말했다.

‘너는 금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쓸 줄을 모르느냐? 마음대로 필요한 것을 모두 충족할 수 있으리라.’

그 자식이 정신을 차리고 금전을 찾으니,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금전(金錢)를 얻었다고 말했느니라. 그 아버지는 말했느니라.

‘어리석은 자식아, 너는 기뻐하지 말라. 얻었다는 금전은 본래 너의 물건이니, 네가 얻은 것이 아니니라. 어찌 기쁘다고 하겠느냐?’

선남자여, 아마라식도 이와 같으니라. 본래 나오는 모습[出相]도 없으며 이제 들어가는 것[入]도 아니니라. 옛적에는 어리석었기 때문이니 없는 것이 아니며, 이제 깨달았다고 하여 들어온 것이 아니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저 아버지는 그 자식이 어리석은 줄을 알면서도 어찌하여 50년이 지나도록 시방으로 돌아다니며 가난과 고난을 겪은 다음에야 비로소 알려 주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0년이 지났다는 것은 한순간19)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요, 시방으로 돌아다녔다는 것은 함부로 분별하는 생각에 끌려 다님이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어떠한 것을 한순간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한순간의 마음이 움직이면 5음이 함께 일어나며, 5음이 일어나는 가운데 50악(惡)20)이 갖추어져 있느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함부로 분별함에 끌려 다니며 시방을 돌아다니고 한순간의 마음이 일어날 때에 50악을 갖추게 되는데, 어떻게 저 중생이 한순간의 마음도 일으키지 않도록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심신(心神)을 가라앉혀 금강 같은 경지[金剛地]에 머물게 하고, 마음이 고요하여 일어남이 없게 하며, 마음을 항상 무사태평하게 하면, 바로 한순간의 마음도 일어남이 없느니라.”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불가사의하옵니다. 깨달음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그 마음이 무사태평하면 바로 본각의 이익입니다. 그 이익은 움직임이 없지만 항상 있어서 없는 것이 아니며, 없는 것이 아니란 것도 있을 수 없으며, 깨닫지 않는다는 것[不覺]이 없지 않으며, 깨달음이 없음[無覺]을 깨달아 알면 그것은 본래의 이익(本利)이요 본각(本覺)입니다. 깨달음이란 청정하고 물듦이 없어서 변이(變易)하지 않고 결정성이기 때문에 헤아려 측량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무주보살이 이 말씀을 듣고 처음 있는 일이라 느껴 게송으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크게 깨달으신 세존이시여,

중생에게 생각 없는 법[無念法]을 설하시니

생각도 없고 생김도 없는 마음이여,

그 마음 항상 생겨서 소멸하지 않는구나.

순일한 깨달음은 본각의 이익

가지가지 본각을 이롭게 하는 것은

마치 저 금전을 얻은 것 같아서

얻은 것이 곧 얻은 것이 아니어라.

그 때에 대중들은 이 말씀을 듣고 모두 본각의 이익인 지혜바라밀을 얻었다.



5. 입실제품(入實際品)

이에 여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

“모든 보살들은 본각의 이익에 깊이 들어가야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느니라. 만일 후세에 때 아닌 때[若後非時]에 진여에 상응하여 법을 설하면 시기와 이익을 함께하기 어려우므로[時利不俱]21) 혹은 순조롭게 말하고 혹은 거슬리게 설법하되 동일한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게 진여에 상응하여 설하느니라. 모든 망정(妄情)과 지견(智見)22)을 이끌어 일체지(一切智)의 바다에 흘러 들어가게 하며, 제도받을 수 있는 중생들로 하여금 헛된 바람에 휩쓸리지 않게 하며, 모두 저들로 하여금 한맛[一味]의 신비로운 젖[神乳]을 바라도록 할 뿐이니라.

세간은 세간이 아니며 머묾은 머무는 처소가 아니니, 다섯 가지 공[五空]에 나가고 들어가되 취하고 버림이 있을 수 없느니라. 왜냐 하면 모든 법의 공한 모습과 바탕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有無] 아니요, 없는 것도 없지 않은 것[無不無]도 아니니라. 없는 것도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니므로 결정된 바탕이 없나니, 있다는 것에도 없다는 것에도[有無]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니라. 저 있다 없다 분별하는 범부나 성인24)의 지혜로는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모든 보살들이 만일 이 이익을 알 것 같으면 바로 보리(깨달음)를 얻으리라.”

그 때 대중 가운데 한 보살이 있었는데 대력(大力)이라 불렀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섯 가지 공에 나가고 들어감에 취하고 버림이 있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다섯 가지 공에서 취하고 버림이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의 다섯 가지 공이란 3유(有)25)가 공이요, 6도(道)의 그림자가 공이며, 법의 모습[法相]이 공이요, 명상(名相)26)이 공이며, 심식(心識)이 공임을 말하느니라. 보살이여, 이와 같은 공들은 공이면서 공에 머물지 아니하며, 공이면서 공의 모습이 없거니와 모양이 없는 법에 어찌 취하고 버림이 있겠는가? 취할 것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면 세 가지 공에 들어가느니라.”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어떠한 것이 세 가지 공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 공이란 공의 모습[空相]도 공하며, 공이 공하다[空空]는 것도 공하며, 그 공해진 것[所空]도 공한 것을 말하느니라. 이와 같은 공들은 세 가지 모습에 머무르지 아니하지만 진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문자와 언어의 길이 끊어져 헤아릴 수 없느니라.”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진실은 없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의 모습은 마땅히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없는 것[無]은 없는 것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있는 것[有]은 있는 것에 머무르지 않으니,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있는 것이 아닌 법[不有之法]은 아니라고 하면 없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다. 없는 것이 아닌 모습[不無之相]은, 아니라고 하면 있는 것에 머무는 것이니, 있고 없는 것으로써 이치를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니라. 보살이여, 이름과 뜻[名義]이 없는 모습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이름 없는 이름이라 하여 이름 없는 것이 아니며, 뜻 없는 뜻이라 하여 뜻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라.”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이와 같은 이름과 뜻은 진실하고 여여[如]한 모습이며, 여여하게 오는 여여한 모습입니다. 그 여여함은 여여함에 머무르지 아니하며, 여여함에는 여여함의 모습이 없습니다. 모습[相]에는 여여함이 없기 때문에 여여하게 오지 않는 것이 없으며, 중생의 마음의 모습들 또한 여여하게 오는 것이니, 중생의 마음에는 마땅히 특별한 경지가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중생의 마음에는 진실로 별다른 경계가 없느니라. 왜냐 하면 마음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며, 이치는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니라. 다만 티끌에 물들었기에 3계라 이름하며, 3계의 마음을 별다른 경계라 이름하느니라. 이 경계는 허망한 것이며, 마음의 변화를 따라서 생긴 것이니, 마음에 허망함이 없을 것 같으면 특별한 경계도 없는 것이니라.”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만일 마음이 깨끗할 것 같으면 가지가지의 경계는 생기지 않을 것이니, 이 마음이 청정할 때는 마땅히 3계가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보살이여, 마음이 경계를 발생시킨 것이 아니고 경계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보이는 모든 경계는 오직 보여지는 마음일 뿐이니, 마음에 환화(幻化)가 없으면 보이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보살이여, 안으로 중생이 없고 세 가지 성품이 공적하면 나라는 무리도 없고 남이라는 무리도 없느니라. 이리하여 두 가지의 들어감[二入]에 이르러도 역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게 되나니, 이러한 이익을 얻으면 3계가 없는 것이니라.”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어떠한 것이 두 가지의 들어감에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까? 마음은 본래 생기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두 가지 들어감이란, 첫째는 이치로 들어감[理入]이요, 둘째는 행함[行]으로 들어가는 것이니라. 이치로 들어간다는 것은, 중생은 참된 바탕[眞性]과 다르지 않지만 하나도 아니요 같은 것도 아니니라. 다만 번뇌[客塵]에 가리어 있을 뿐이며,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것임을 깊이 믿는 것이니라. 마음을 깨우침의 관법[覺觀]에 집중하되 불성을 잘 관찰하여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자신도 없고 다른 이도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둘이 아닌 금강 같은 마음의 경지[金剛心地]에 굳게 머물러 이동하지 아니하며, 적정(寂靜)하여 인위적인 조작이 없고 분별함이 없으면, 이것을 이치로 들어가는 것[理入]이라 부르는 것이니라.

행함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마음이 어디로 기울거나 의지하지 아니하고 그림자(경계의 영상)가 흘러 변함이 없으며, 있는 곳[有處]에서 고요히 생각하되, 찾는 것이 없어서 바람이 두드리나[風鼓 : 경계의 바람] 움직이지 않기가 마치 대지(大地)와 같으며, 대상[心]과 주체[我]를 버리고 중생을 제도하되 생김도 없고 모습도 없으며,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 것이니라.

보살이여, 마음에는 나가고 들어옴이 없고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없는 마음은 들어오되 들어오지 않는 것이므로 들어오는 것이라 부르느니라.

보살이여, 이와 같이 법에 들어가되 법의 모습[法相]은 공하지 아니하며, 공하지 않은 법이지만 헛되이 버리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없는 것이 아닌 법은 공덕을 갖추고 있으며, 마음도 아니요 그림자(경계)도 아니며, 법이(法爾 : 법 그대로)27)가 청정하기 때문이니라.”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어찌하여 마음도 아니요 그림자도 아니며, 법이가 청정하다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공하고 여여한[空如] 법은 심식(心識)의 법이 아니요, 마음의 부림[心使]이 소유한 법도 아니니라. 공한 모습[空相]의 법도 아니며, 물질적인 모습[色相]의 법도 아니니라. 마음의 유위(有爲)와 서로 응하지 않는 법도 아니며, 마음의 무위(無爲)와 서로 응하는 법도 아니니라. 드러난 그림자도 아니며 어떠한 현상으로 드러내어 보이는 것도 아니니라. 자성(自性)도 아니며 차별도 아니요, 이름도 아니며 모습[相]도 아니요, 뜻[義]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뜻에는 여여함[如]이 없기 때문에 여여함이 없는 법 또한 없는 것이요 여여함이 없는 것이며, 여여함이 없는 것도 있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여여함이 없는 법이 있다는 것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근본 이치인 법은 이치도 아니며 근본도 아니요, 모든 쟁론(爭論)을 떠나 그 모습을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니라. 보살이여, 이와 같이 청정한 법은 생기되 생김이 있는 법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요, 없어지되 없어지는 법으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라.”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이와 같은 법의 모습은 무엇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홀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굴레를 메울 수도 없고 무엇과 짝지을 수도 없으며, 모이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며, 생기는 것도 아니요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또한 오는 모양이나 가는 모양이 없으니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불가사의하고도 불가사의하니라. 마음과 마음도 역시 그러하니라. 왜냐 하면 여여함[如]은 마음과 다르지 않나니, 마음은 본래 여여하기 때문이니라.

중생의 불성(佛性)은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니라. 중생의 바탕은 본래 생기고 없어짐이 없나니, 생기고 없어지는 바탕은 그 바탕이 본래 열반이니라. 바탕과 모습[性相]이 본래 여여하며, 여여함에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니라.

일체의 법의 모습[法相]은 인연을 따르나 일어남이 없으며, 일어나는 모습과 바탕은 여여하며, 여여함은 움직이는 바가 없는 것이니라. 인연의 바탕과 모습은 서로가 본래 공한 것이며, 인연과 인연은 공하고 공한 것이어서 인연으로 일어날 수 없느니라. 일체의 연기법은 미혹한 마음과 망령된 견해이며, 드러난 것은 본래 생김이 없는 것이니, 인연의 근본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마음은 법의 이치와 같아서 자체가 공하여 없는 것이니라. 저 공의 으뜸[空王]은 본래 머무르는 곳이 없건마는, 범부의 마음은 망령되이 분별해서 보는 것과 같으니라.

여여의 모습은 본래 있고 없는 것이 아니니라.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모습은 오직 심식(心識)을 보는 것일 뿐이니라. 보살이여, 이러한 심법(心法)은, 자체는 없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니라. 보살이여, 없다느니 없지 않다느니[無不無] 하는 모습은 언설로 도달하는 경지가 아니니라. 왜냐 하면 진여의 법은 텅 비어서 모습이 없나니, 2승(乘)이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허공의 경계는 안과 밖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여섯 가지를 실천하는[六行] 보살28)이라야 이것을 알 수 있느니라.”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어떠한 것을 6행(行)이라 합니까? 원컨대 설명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첫째는 10신행(信行)이요, 둘째는 10주행(住行)이요, 셋째는 10행행(行行)이요, 넷째는 10회향행(回向行)이요, 다섯째는 10지행(地行)이요, 여섯째는 등각행(等覺行)이니, 이와 같이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능히 알 수 있느니라.”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실제(實際)에 대한 깨달음의 이익은 나가고 들어옴이 없나니, 어떠한 법과 마음으로 실제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실제의 법은, 법에 끝[際]이 없으므로 끝이 없는 마음이면 실제에 들어가느니라.”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끝없는 마음의 지혜는 그 지혜가 가이없으며, 가이없는 마음은 마음에 자재함을 얻나니, 자재로운 지혜라야 실제(實際)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 범부들처럼 마음이 유약한 중생들은 그 마음에 헐떡거림이 많으리니, 어떠한 법으로 다스려야 견고한 마음을 얻어서 실제에 들어가게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저 마음이 헐떡거리는 자는 안과 밖의 번뇌[使]로 끄달림에 따라서 흘러가 물방울이 모여 바다를 만드느니라. 커다란 바람이 파도를 치면 큰 용이 놀라 날뛰나니, 그 놀라 날뛰는 마음 때문에 헐떡거림이 많게 되느니라. 보살이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셋을 보존하고 하나를 지키게 해서[存三守一] 여래선(如來禪)에 들어가게 하나니, 선정 때문에 마음은 헐떡거림이 없어지느니라.”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어떠한 것을 셋을 보존하고 하나를 지키게 해서 여래선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셋을 보존한다는 것[存三]은 세 가지 해탈을 보존하는 것이요, 하나를 지키게 한다는 것[守一]은 한마음의 진여[如]를 지키는 것이니라. 여래선(如來禪)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치로써 마음의 청정한 진여를 관찰[觀]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마음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실제(實際)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세 가지 해탈법이란 어떠한 일이며, 이치로써 관찰하는 삼매(三昧)는 어떠한 법을 따라서 들어갑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 해탈이란 바로 허공해탈[虛空] 금강해탈[金剛] 반야해탈[般若]을 말하며, 이치로 관찰[觀]한다는 것은 마음이 이치대로 청정하여 마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니라.”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어떠한 것을 작용을 보존하는 것[存用]이라 하며, 어떠한 것을 관찰한다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과 현상[事]이 둘이 아닌 것을, 작용을 보존하는 것이라 부르고, 안으로 행하고[內行] 밖으로 행함[外行]에,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둘이 아니며, 하나의 모습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에 얻고 잃음이 없어서 동일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은 경지로 깨끗한 마음이 흘러들어 가는 것을 관찰한다고 부르는 것이니라.

보살이여, 이러한 사람은 두 가지 모습에 머무르지 않느니라. 비록 출가를 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집에 있는 것[在家]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비록 법복(法服)이 없고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29)를 갖추지 아니하였으며, 포살(布薩)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은 인위적인 조작이 없이[無爲] 저절로 편안하기 때문에 성인의 도과(道果)를 얻어서 2승(乘)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보살도에 들어간 뒤에 마땅히 수행의 경지를 채워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루게 되느니라.”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출가(出家)하지는 않았지만 출가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왜냐 하면 열반의 저택에 들어가서 여래의 옷을 입고 깨달음의 자리에 앉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문(沙門)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존경하고 공양하여야 하겠습니다.”

29) 포살이나 자자를 시행할 때 장로가 대중들 앞에서 읽게 되는 계본(戒本). 여기에 적힌 계율 조항을 위반했을 경우는 고백하고 대중들의 용서를 구하고 참회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왜냐 하면 열반의 저택에 들어가서 마음은 3계를 뛰어넘었으며, 여래의 옷을 입고 법이 공한 곳에 들어갔으며, 깨달음의 자리에 앉아서 정각(正覺: 바른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갔으니, 이와 같은 사람은 마음으로 두 가지 나[二我]를 뛰어넘었거늘, 어찌 하물며 사문이라 하여 존경하고 공양하지 않겠는가?”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저와 같이 순일한 경지[一地]와 공의 바다[空海]는 2승(乘)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저 2승(乘)의 사람들은 삼매에 탐닉하여 삼매의 몸을 얻지만 저 공의 바다인 순일한 경지에서는 마치 술 병[酒病]을 얻어 침침하며 취하여 깨어나지 못하거나, 수많은 시간을 보내고도 오히려 깨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나니, 술기운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깨어나며, 바야흐로 이러한 행함[行]을 닦은 뒤에 불신(佛身 : 부처님의 몸)을 얻게 되는 것이니라.

저러한 사람은 일천제(一闡提)30)를 버림에 따라서 곧 여섯 가지의 행함[六行]에 들어가며, 행하는 경지와 처소에서 한 생각의 깨끗한 마음이 청정하며, 결정코 명백하여 금강 같은 지혜의 힘[金剛智力]으로 아비발치의 경지[阿跋致]31)에서 중생을 제도하되 자비심에 다함이 없느니라.”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이러한 사람은 마땅히 계율(戒律)을 지키지 않으리니, 저 사문들을 마땅히 공경하여 우러러보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계율을 설명하는 사람이 되면 착하지 않고 교만하기 때문이며, 마음 바다의 파도와 물결 때문이니라. 그러나 그의 마음의 땅[心地]은 8식(識)의 바다가 잔잔해지고, 9식(識)의 흐름이 청정하여 바람이 그것을 움직일 수 없고, 파도와 물결이 일어나지 않나니, 계율의 근본 바탕은 공과 같아서 그것을 지키는 자는 도리어 미혹하여[迷] 엎어지는 것이니라. 저러한 사람은 7식(識)과 6식이 일어나지 않고 가지가지의 갈망과 애욕[諸集]이 사라져 고요하며, 세 부처[三佛]를 여의지 않고 보리심을 발하느니라. 세 가지 모습 없는 가운데서 마음에 순응하여 심오하게 들어가되 3보(寶)를 깊이 공경하고 위의(威儀)를 잃지 않기 때문에 저 사문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보살이여, 저 어진 사람32)은 세간의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법에 머무르지 않으며, 세 가지 공한[三空] 마을[聚]에 들어가 세 가지 법[三有]의 마음을 없애느니라.”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저 어진 사람은 과족만덕(果足滿德)부처님과 여래장(如來藏)부처님과 형상(形像)부처님 등 이러한 부처님의 처소에서 보리심을 발하여 세 가지의 청정한 계율[三聚戒]에 들어가지만 그 모습[相]에 머무르지 않고, 3계33)의 마음을 없애 버리되 공적한 경지에 거주(居住)하지 않으며, 제도할 만한 중생을 버리지 않으려고 고르지 못한 땅[不調地 : 중생계]에 들어갔으니 불가사의합니다.”

그 때에 사리불(舍利弗)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반야의 바다를 갖추었지만

열반의 성역에 머물지 않나니

마치 저 미묘한 연꽃이

높은 언덕에서 나지 않은 것 같네.

모든 부처님께서 한량없는 세월에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으시고
세상 건지신 뒤에 득도하심은

마치 진흙에서 연꽃이 나오는 것 같네.

저러한 6행(行)의 경지는

보살(菩薩)이 닦을 바요,

저러한 3공(空)의 마을은

보리의 참된 길이네.

나는 이제 머물되 머무르지 않는 것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올 곳으로 다시 돌아와

보살도 갖춘 뒤에 벗어나리라.

또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나와 하나요 둘이 없게 하듯이

앞에 온 이나 뒤에 오는 이

모두 바른 깨침에 오르게 하리.

그 때에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불가사의하니라. 너는 마땅히 장차 깨달음의 길을 성취하여 한량없는 중생들이 생사(生死)의 바다를 벗어나게 하리라.”

그 때에 대중들은 모두 보리를 깨달았고, 많은 소승의 무리들은 다섯 가지의 공[五空]한 바다에 들어갔다.



6. 진성공품(眞性空品)

그 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도를 닦는 데는 이름과 모습이 있을 수 없으며, 세 가지 청정한 계율[三戒]에는 형식도 없는데, 어떻게 수용하여 중생을 위해 설명하겠습니까? 원하옵건대 부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를 위해 말씀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대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그대를 위해 설명하여 주리라. 선남자여, 좋거나 좋지 않은 법은 마음에 따라서 변화하여 생기는 것이니라. 일체의 경계는 의식과 언어로 분별한 것이니, 한 곳에서 제어(制御)하면 온갖 인연이 끊어져 없어지리라. 왜냐 하면 선남자여, 순일한 본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 가지의 작용[用]은 베풀어지지 않을 것이요, 여여한 이치에 머무르면 6도의 문이 닫힐 것이며, 네 가지 인연이 순조로울 것 같으면 세 가지 계율이 갖추어지리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어떠한 것이 네 가지 인연이 순조로울 것 같으면 세 가지 계율이 갖추어진다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가지 인연이란, 첫째는 택멸(擇滅)34)하는 힘으로 취하는 인연[擇滅力取緣]이니 섭률의계(攝律儀戒)35)를 말하며, 둘째는 본각의 이익인 청정한 근기의 힘으로 모여 일어나는 인연[本利淨根力所集起緣]이니 섭선법계(攝善法戒)36)를 말하는 것이요, 셋째는 근본 지혜와 대비의 힘에서 연유[本慧大悲力緣]하는 섭중생계(攝衆生戒)37)를 말하며, 넷째는 순일한 깨달음에 통달한 지혜의 힘에서 연유[一覺通智力緣]하는 여여함에 따라 머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네 가지 인연이라 말하느니라.

선남자여, 이러한 네 가지 큰 인연의 힘은 현상의 모습[事相]에는 머물지 않지만 공용(功用)이 없는 것이 아니며, 한 곳[一處:本覺境地)을 떠나서는 찾을 수 없느니라. 선남자여, 이와 같은 하나의 일은 전체적으로 6행을 받아들였으니,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인 일체지혜의 바다이니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현상의 모습[事相]에는 머무르지 않지만 공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란 법의 참된 공이며, 영원하고[常], 즐겁고[樂], 불멸의 나요[我], 청정한 것[淨]은 두 가지 나38)를 뛰어넘은 위대한 열반이며, 그 마음에는 얽매임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힘의 관행(觀行)이며, 이러한 관행의 깨달음 가운데 마땅히 37조도품의 법[道品法]을 갖추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37조도품의 법을 갖추었느니라. 왜냐 하면 4념처(念處), 4정근(正勤), 4여의족(如意足), 5근(根), 5력(力), 7각지(覺支), 8정도(正道) 등의 이름은 많으나 그 뜻이 하나이니라. 또한 동일한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니 이름과 숫자 때문이며, 다만 이름뿐이요 문자일 뿐이니라. 법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얻을 수 없는 법은 하나의 뜻이요, 문자에는 없나니, 문자(文字)가 없는 모습과 의미는 진실한 공의 바탕이니라. 공한 바탕의 의미는 실답게 여여하며, 여여한 이치는 일체의 법을 갖추었느니라. 선남자여, 여여한 이치에 머무르는 사람은 세 가지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게 되느니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일체의 법이란 모두 다 언어와 문자일 뿐이나 언어와 문자의 모습이 바로 뜻이 되지는 않느니라. 실다운 뜻을 언어로 의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제 여래께서는 어떻게 법을 설하시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법을 설하는 것은 너희 중생들이 말씀을 일으키는 데(상태나 환경)에 있으므로 말할 수 없는 것을 설하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는 것이니라. 내가 설한 것은 의어(義語: 뜻말)이지 문어(文語 : 글말)가 아니니라. 중생이 설명하는 것은 문어이지 의어(義語)가 아니니라. 의어가 아닌 것은 모두 공허하여 실답지 않은 것이니, 공허하여 실답지 않은 말[空無之言]은 그 뜻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뜻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속이는 말[妄語]이니라. 뜻과 같이 말하자면 실상의 공은 공이 아니며 공허한 실상은 진실한 것이 아니니라. 두 가지 모습을 떠나 중간이라 할지라도 맞지 않나니, 그 알맞지 않은 법은 세 가지 모습[三相]을 떠나 처소를 볼 수 없으므로 여여한 그대로 말하느니라. 여여함에는 없다거나 있다거나 하는 것이 없나니, 없다는 것은 없다는 법에 대해서 있는 것이니라. 여여함에는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이 없나니, 있다는 것은 있다는 법에 대해서 없는 것이니라. 여여함에는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말씀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여여함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여여함은 여여함을 소유하지 않으므로 여여한 말씀이 없는 것도 아니니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일체의 중생들은 일천제(一闡提)를 따르나니 일천제의 마음은 어떠한 지위에 머물러야 여래와 여래의 실상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천제의 마음을 따라 여래와 여래의 실상에 도달하여 다섯 등급의 지위에 머무느니라.

첫째는 믿음의 지위[信位]이다. 이 몸 속의 진여의 종자(種子)는 망령된 마음으로 가려져 있으나 망령된 것을 버리면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을 믿는 것이니, 마음이 청정하면 명백하게 모든 경계가 의식과 언어의 분별인 줄을 아느니라.

둘째는 생각하는 지위[思位]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모든 경계는 오직 의식과 언어뿐이며, 의식과 언어의 분별은 마음대로 나타나는 것이요, 보이는 경계는 나의 본래의 식(識)이 아니라고 관하는 것이니라. 이 본래의 식은 법도 아니며 뜻도 아니요, 잡히는 것도 아니며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닌 줄을 아는 것이니라.

셋째는 닦는 지위[修位]이다. 닦는다는 것은 항상 수행하고자 하는 주체적인 마음[能起]을 일으키되 마음을 일으킴과 닦음이 동시이니라. 먼저 지혜로써 이끌어서 가지가지의 장애와 난관[障難]을 배제하고 속박(번뇌나 업장)에서 벗어나는 것이니라.

넷째는 행함의 지위[行位]이다. 행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의 행함의 경지를 벗어나 마음에 취하고 버리는 것이 없느니라. 지극히 청정하고 근기가 예리하여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여여함은 결정된 보배로운 바탕이며 위대한 열반의 경지이니, 오직 바탕만이 공하고 클 뿐이니라.

다섯째는 버리는 지위[捨位]이다. 버린다는 것은 바탕이 공한데도 머물지 않는 것이니라. 바른 지혜는 흘러서 변하지만 대비의 여여한 모습이며, 그 모습은 여여함에도 머무르지 않느니라. 삼먁삼보리(三藐三菩提)39)는 마음을 비워 깨닫지 않는 것이니, 마음에는 변제(邊際 : 변두리나 끝)가 없어서 처소를 볼 수 없으며, 이것이 여래에 이르는 길이니라.

선남자여, 이 5위(位)는 순일한 깨달음이니라. 본각의 이익에 따라서 들어가나니, 만일 중생을 교화하고자 한다면 그 본처(本處)에 따라야 하느니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어떠한 것을 그 본처에 따르는 것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근본이란 없느니라. 정해진 처소가 없는 데에 살면서 변제(邊際)를 비우고 실상에 들어가며, 보리심을 일으켜 성스러운 길[聖道]을 원만하게 성취하는 것이니라. 왜냐 하면 선남자여, 마치 손으로 저 허공을 잡는 것과 같아서 잡은 것도 아니며, 잡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셨듯이 불사에 앞서서 본각의 이익으로써 취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적멸을 생각하는 것이며, 적멸은 여여한 것입니다. 가지가지의 공덕을 다 지니고, 마땅히 일체의 법을 진열하되 원융무애하여 둘이 아니니 헤아려 측량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이 법을 알면 바로 이것이 마하반야바라밀입니다. 이것은 크게 신비한 주문[大神呪]이며, 이것은 크게 밝은 주문[大明呪]이며, 이것은 위없이 밝은 주문[無上明呪]이며, 이것은 위없이 평등한 주문[無等等呪]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진여는 공한 바탕이니라. 바탕이 공한 지혜의 불은 가지가지의 번뇌[結]를 태워 없애 버려 평등하고 평등하니라. 등각(等覺 : 평등한 깨달음)의 세 가지 경지[三地]와 묘각(妙覺 : 묘한 깨달음)의 세 가지 몸[三身]이 9식(識) 가운데서 명백하여 밝고 깨끗하며 가지가지의 그림자가 있을 수 없느니라.

선남자여, 이 법은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니, 그것은 지혜 자체의 작용(作用)이기 때문이니라. 움직임도 아니고 고요함도 아니니, 그것은 작용의 바탕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그것은 공한 모습도 공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만일 중생을 교화할 것 같으면 저 중생들이 이 뜻을 관찰[觀]하여 들어가게 해야 하느니라. 이 뜻에 들어가면 이것이 여래를 보는 것이니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여래를 뜻으로 관찰하면 가지가지의 흐름에 머무르지 않으며, 마땅히 4선(禪)40)을 여의고 유정천(有頂天)41)을 뛰어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법은 이름과 숫자일 뿐이니 4선도 이와 같으니라. 만일 여래를 볼 것 같으면 여래의 마음은 자유로워서 항상 멸진처(滅盡處)에 있으며, 나오는 것도 아니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그것은 안과 밖이 평등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저러한 가지가지의 선관(禪觀)은 모두 생각이 공한 선정이거니와 이 여여함은 그것과 다르니라. 왜냐 하면 여여함으로 여여함의 실상을 관찰하되 여여함의 모양을 보고 관찰할 수 없이 가지가지의 모습이 적멸하나니, 적멸이 바로 여여의 뜻이기 때문이니라. 저와 같이 생각이 있는 선정(禪定)은 움직임이지 선(禪)이 아니니라. 왜냐 하면 선의 바탕[禪性]은 가지가지의 움직임을 여읜 것이므로 물들게 하는 것도 아니며 물들어진 것도 아니요, 법도 아니며 그림자도 아니니라. 가지가지의 분별을 떠난 본각의 이익이란 뜻이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이와 같이 관찰하는 선정(禪定)이라야 선(禪)이라 이름하느니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여래께서는 항상 여여한 실상으로 중생을 교화하시되 이러한 실상의 뜻에는 글이 많고 뜻이 풍부하여 근기가 영리한 중생은 닦을 수 있으려니와 근기가 아둔한 중생은 뜻을 알기가 어려우리니, 어떠한 방편으로 저 아둔한 중생들이 이 진리에 들어오도록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아둔한 근기의 중생들이 하나의 사구게(四句偈)를 받아 지니게 하면 참된 진리에 들어가리라. 일체의 불법이 하나의 게송 가운데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이 여쭈었다.

“어떠한 것이 네 구절로 된 게송입니까? 원하옵건대 말씀하여 주십시오.”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인연으로 생긴 뜻은,

이 뜻은 적멸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며,

가지가지의 생멸(生滅)을 소멸한 뜻은,

이 뜻은 생함이요, 멸함이 아니니라.

그 때에 대중들은 이 게송 설하시는 것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으며, 모두 생김이 없는 법과 생김이 없어진 지혜와 바탕이 공한 지혜의 바다를 얻었느니라.



7. 여래장품(如來藏品)

그 때 범행 장자(梵行長子)가 본제(本際)42)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생긴다는 뜻이므로 소멸하지 않으며, 소멸한다는 뜻이니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여의 뜻이 바로 부처님의 보리입니다. 보리의 바탕이 바로 분별없는 것이며, 분별없는 지혜는 그 끝이 없음을 분별하나니, 다함 없는 모습[無窮之相]은 분별이 소멸한 것일 뿐이라 이러한 뜻의 모습[義相]은 불가사의하고, 불가사의한 가운데는 분별이 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일체 법의 수량은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으나 끝이 없는 법의 모양은 하나의 실다운 뜻의 바탕이며, 오직 하나뿐인 성품에 머무르게 된다는 그 일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여, 불가사의하니라. 내가 설한 가지가지의 가르침은 어리석은 자를 위하기 때문이며 방편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니라. 일체 가르침의 모습은 하나요, 실다운 뜻의 지혜이니라.

왜냐 하면 마치 한 시장에 네 개의 대문[四大門]을 열어 놓으면, 이 네 개의 대문은 모두 하나의 시장으로 돌아가듯이, 저 중생들이 마음대로 들어가게 되는 가지가지 가르침의 맛 또한 이와 같으니라.”

범행 장자가 여쭈었다.

“가르침이 만일 이러하다면, 제가 한맛[一味]에 머무르면 마땅히 일체의 모든 맛을 포섭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왜냐 하면 한맛의 진실한 뜻은 하나의 큰 바다와 같아서 일체의 흐름이 들어가지 않음이 없느니라. 장자여, 일체 가르침의 맛은 오히려 저 뭇 흐름과 같아서 이름과 수량은 비록 다르지만 그 물은 다르지 않느니라. 만일 큰 바다에 들어가면 여러 흐름을 통괄하여 한맛에 머무르게 되나니, 곧 가지가지의 맛을 끌어안기 때문이니라.”

범행 장자가 여쭈었다.

“모든 가르침이 한맛이라면 어찌하여 3승의 길[三乘道]과 그 지혜에 차이가 있다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여, 비유하자면 강(江)과 하수(河水)와 회수(淮水)와 바다[海]는 크

고 작음이 다르기 때문이며, 깊고 얕음의 차이 때문이며, 이름과 글자의 구별 때문이니라. 물이 강 가운데 있으면 강물이라 부르고, 하수 가운데 있으면 하수라 부르고, 회수 가운데 있으면 회수라 부르지만 물이 함께 바다 가운데 있으면 바닷물이라 부르는 것처럼 가르침 또한 이와 같아서 함께 진여에 있으면 단지 부처의 길[佛道]이라 부를 뿐이니라.

장자여, 유일한 부처의 길[佛道]에 머무르면 세 가지 행[三行]을 통달하느니라.”

범행 장자가 여쭈었다.

“어떠한 것을 세 가지 행[三行]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 행이란, 첫째는 현상에 따라 취하는 행[隨事取行]이며, 둘째는 식에 따라 취하는 행[隨識取行]이며, 셋째는 진여에 따라 취하는 행[隨如取行]이니라.

장자여, 이와 같은 세 가지 행은 많은 방법들을 모두 다 섭수(攝受)하고 있으며, 일체 가르침의 방법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느니라. 이 행에 들어오는 자는 공이란 모습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이렇게 들어오면 여래장(如來藏)에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느니라. 여래장에 들어간다는 것은 들어가되 들어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범행 장자가 여쭈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여래장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싹이 열매를 맺은 것과 같아서 들어가는 곳이 없습니다. 줄기와 뿌리의 이로운 힘[利力]이 이롭게 그 근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근본 실제(實際)를 얻으면 그 지혜는 얼마나 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지혜는 끝이 없으나,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 지혜에는 네 가지가 있느니라.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결정된 지혜[定智]이니 여여함을 따르는 것이며, 둘째는 결정되지 않은 지혜[不定智]이니 방편으로 병(病)을 꺾어 부수는 것이며, 셋째는 열반의 지혜이니 전각(電覺)43)의 실제(實際)를 제거함이며, 넷째는 마지막 지혜[究竟智]이니 실상에 들어가 부처의 길을 갖추는 것이니라.

장자여, 이와 같이 네 가지 중요한 작용[用]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라. 이것은 큰 다리[橋梁]이자 커다란 나루터이므로 만일 중생을 교화하려면 마땅히 이 지혜를 사용해야 하느니라.

장자여, 이 커다란 작용을 사용하는 데는 다시 세 가지 중대한 사업이 있느니라.

첫째는 세 가지 삼매에서는 안과 밖44)이 서로 빼앗지 않으며, 둘째는 대(大) 의(義) 과(科)에서는 도리에 따라 간택하여 소멸시키며, 셋째는 진여의 지혜와 선정에서는 위대한 자비(大悲)로써 이익을 함께 하느니라.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은 보리를 성취시키느니라. 이 일을 실행하지 않으면 능히 저 네 가지 지혜의 바다에 흘러 들어갈 수 없으며, 가지가지의 커다란 마군이가 그 유리한 기회를 얻게 되리라.

장자여, 너희들 대중은 성불(成佛)할 때까지 항상 닦고 익히되 잠시도 실수해서는 안 되느니라.”

범행 장자가 여쭈었다.

“어떠한 것을 세 가지의 삼매(三昧)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 삼매란 공삼매(空三昧) 무상삼매(無相三昧) 무작삼매(無作三昧)이니라.”

범행 장자가 여쭈었다.

“어떠한 것을 대(大) 의(義) 과(科)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는 4대(大)를 말하며, 의는 5음(陰) 18계(界) 6입(入)을 말하며, 과는 근본 식[本識]을 말함이니, 이것을 대 의 과라 하느니라.”

범행 장자가 여쭈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이와 같은 지혜의 공용(功用)은 스스로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여 3계의 경지를 넘어가며, 열반에도 머물지 않고 보살도에 들어갑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의 모습은 생하고 소멸하는 법이니,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분별을 여의면 법은 마땅히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 여래께서는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은 분별을 따라 생기고

다시 분별을 따라 도리어 없어지네.

가지가지 분별하는 법을 없애 버리면

이 법은 나고 없어지는 법이 아니네.

그 때 범행 장자는 이 게송 설하시는 것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그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말하였다.

모든 법은 본래 적멸한 것

적멸은 또한 생김이 없나니

이 모든 나고 없어지는 법

이 법은 생김 없는 것도 아니어라.

저것이 바로 이것과 함께하지 않나니

단멸[斷]과 상존[常]을 지니기 때문이네.

이것은 바로 두 가지를 떠났지만

또한 하나의 머묾에도 있지 않네.

만일 법에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이 모습은 털바퀴와 같은 것

마치 아지랑이와 물이 뒤바뀌듯이

모두가 허망하기 때문이라네.

만일 법이 없다고 본다면

이 법은 마치 허공과 같으리니

장님은 해[日]를 볼 수 없듯이

법을 설명해도 거북의 털과 같네.

제가 이제 부처님 말씀을 듣고

법에는 두 가지 견해가 없음을 알았으며

또한 중간에 의지해 머물지도 않기에

머묾 없음에 따라 뜻을 받아 지니네.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머묾 없음을 따르나니

나도 머묾 없는 곳을 따라서

이곳에서 여래를 예배합니다.

여래의 모습에 경건히 예배하는 것은

허공처럼 움직이지 않는 지혜이며

처소 없음에도 집착하지 않으니

머묾 없는 몸에 경례합니다.

저는 어디서나

항상 모든 여래를 뵈옵나니

오직 원하옵건대 모든 여래께서는

저를 위해 영원한 법 말씀하소서.

그 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선남자들이여, 너희들은 자세히 들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영원한 법[常法]을 말하리라.

선남자여, 영원한 법이란 영원한 법이 아니니라. 말도 아니고 글자도 아니며, 진리[諦]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고 경계도 아니니라. 가지가지의 망령됨과 단멸의 경계를 떠난 것이니라. 이 법은 무상한 것이 아니라 일체의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을 떠난 것이니라. 식(識)을 투철하게 보면 항상하는 것이지만 이 식은 항상 적멸하며, 적멸하다는 것 또한 적멸하느니라.

선남자여, 법의 적멸을 인식하는 자는 마음을 적멸하게 하지 않았으나 마음이 항상 적멸하느니라. 적멸을 얻는 자는 마음이 항상 참된 관찰[觀]에 있느니라.

가지가지의 명색(名色)46)은 오직 이 어리석은 마음[痴心]일 뿐임을 아나니, 어리석은 마음의 분별로 모든 법을 분별하기 때문에 명색에서 벗어나는 어떤 다른 일이 없느니라. 법이 이와 같음을 알고 문자와 말에 따르지 않으며, 마음은 뜻을 핵심으로 삼아 나[我]를 분별하지 않고 나라는 것이 가명인 줄을 알면 바로 적멸을 얻을 것이니, 만일 적멸을 얻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그 때 장자 범행은 이 말씀을 듣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이름의 모습[相]과 분별하는 일과

법을 셋이라 부르며

진여와 바르고 묘한 지혜는

그것과 다섯을 형성했네.

저는 이제 이 법이

단견과 상견에 얽매여

나고 없어지는 길에 들어간 줄 아나니

이것은 단견(斷見)이요 상견이 아니어라.

여래께서 공한 법을 말씀하시니

단견과 상견에서 멀리 떠나 있도다.

인연은 없는 것이니 생기지 않는 것

생기지 않으므로 없어지지 않는 것이어라.

인연에 집착하여 있다[有]고 하는 것은

마치 허공 속에서 꽃을 따려는 것과 같고

석녀(石女)의 아기를 구하려는 것과 같아서

필경에는 얻을 수 없으리라.

모든 인연을 떠나서 취하고

또한 다른 것을 따르지 않고 소멸한다.

자신의 5온 12처 18계와 4대에 미쳐서는

진여에 의지하므로 실상을 얻으리.

이러므로 진여의 법은

항상 자재하여 여여하나니

일체 모든 법은

진여가 아니라 식이 변화한 것일세.

식을 여의면 모든 법은 공한 것

이러므로 공한 곳을 따라서 말하나니

생기고 없어지는 모든 법을 없애고

언제나 열반에 머묾이여.

대비가 빼앗는 바이며

열반은 없어져서 머무르지 않나니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를 변화시켜

여래장에 들어가게 하시네.

그 때에 대중들이 이 뜻에 대한 설명을 듣고 모두 바른 생활을 얻어 여래의 여래장의 바다에 들어갔다.



8. 총지품(摠持品)

그 때 지장(地藏)보살이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 부처님 앞으로 나와 합장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대중을 관찰하매 마음에 의심하는 일이 있어서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한 듯합니다. 이제 여래께서는 그 의심을 제거하여 주시고자 하시니, 제가 이제 대중을 위하여 의심에 따라 묻는 바입니다. 원하건대 부처님께서는 자비로 불쌍히 여겨 허락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여, 그대는 이와 같이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려니와 이것은 위대한 자비라, 헤아려 생각하기가 어렵느니라. 그대는 마땅히 널리 물어라. 그대를 위하여 설명하리라.”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일체의 모든 법이 어찌하여 인연으로 생기지 않는다 하십니까?”

그 때 여래께서는 이 뜻을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일 법이 인연으로 생기는 바

인연을 떠나 법도 있을 수 없다면

어떻게 법의 고정된 바탕[性]이 없는데

인연으로 법이 생길 수 있겠는가?

그 때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법이 만일 생김이 없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설법을 하시되 법이 마음을 따라서 생긴다고 말씀하십니까?”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것이 마음으로 생겨난 법[所生法]이라면

이 법은 능취(能取 : 주체)와 소취(所取 : 대상)이니

술취한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는 것 같아

이 법도 그러하여 저것이 아니네.

그 때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법이 만일 이와 같다면 법은 곧 의지할 상대가 없는 것이니, 의지할 상대가 없는 법은 마땅히 저절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은 본래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나다 남이다 하는 것도 그러하니라.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끝나는 것도 아니며

이루어지고 무너짐에도 머물지 않느니라.

그 때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일체 모든 법의 모습이 바로 본래의 열반이며, 열반과 공의 모습도 이와 같나니, 이러한 법들이 없으면 이 법은 여여함에 상응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러한 법이 없어야 이 법이 여여하니라.”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이와 같은 진여의 모습은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며, 뜻으로 취득하는 것이나 업으로 취득하는 것이나 모두 공적하나니, 공적한 마음과 법은 함께 취득할 수 없는 것이므로 마땅히 적멸합니다.”

그 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일체의 공적(空寂)한 법

이 법은 고요하나 공한 것은 아니다.

저 마음이 공하지 않을 때에

이러한 마음의 얻음은 있지 않으리.

그 때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이 법은 3제(諦 : 색 공 심)가 아니니라. 3제인 물질[色] 허공[空] 마음[心]도 없어지는 것이거니와 이 법이 본래 소멸할 때에는 이 법도 마땅히 이러한 소멸에 상응하겠습니다.”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은 본래 자성이 없건만

저것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니

이와 같은 차별이 있는 곳에서가 아니라

저 그러함[如是]에 있느니라.

그 때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일체 모든 법은 생김도 없고 소멸함도 없거늘 어찌하여 하나가 아니라 합니까?”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은 머무르는 곳이 없으며

모습과 수효는 공하므로 없나니

이름[名]과 언설의 두 가지와 법,

이것은 바로 능취와 소취이니라.

그 때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일체 모든 법의 모습은 두 언덕에도 머물지 않으며, 또한 중간의 흐름에도 머물지 않나니, 심식(心識)도 이러하거늘, 어찌하여 가지가지의 경계가 식(識)을 따라 생긴 것이라 하십니까? 만일 식이 생김[生]을 지닐 수 있다면 이 식 또한 생김을 따르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생김이 없다고 하십니까? 식이 능생(能生)이라면 소생(所生)을 지니는 것입니다.”

이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소생과 능생 두 가지는

두 가지인 능연과 소연이라.

본래 각각의 자아가 없나니

있음에 사로잡히는 것은 허공의 꽃 같은 환상이니라.

식의 생김이 아직 없을 적에

경계는 이 때에 생긴 것이 아니니라.

경계가 아직 생기지 않았을 적에

이 때는 식도 역시 사라지느니라.

그것들은 본래 함께 없는 것

또한 있다거나 없다거나가 아닌 있음이니,

생김이 없으면 식 역시 없는 것,

어찌 경계가 있음을 따른다고 하는가?

그 때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법의 모습은 이와 같아서 안과 밖이 함께 공하여 경계와 지혜 두 가지 무리는 본래 적멸하니라. 여래께서 말씀하신 실상은 진실로 공한 것이니, 이와 같은 법은 바로 집기(集起)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실다운 법은 물질도 아니고 머묾도 없으며, 집기되는 것도 아니고 집기시키는 것도 아니며, 의(義)도 아니고 대(大)도 아닌 순일한 본각의 이로운 법이니 깊은 공덕의 무더기이니라.”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불가사의하고 불가사의한 무더기입니다. 7식과 전5식이 생기지 않으면 8식과 6식이 적멸하며, 9식의 모습도 공하여 없을 것입니다. 있음[有]도 공하여 있을 수 없고, 없음[無]도 공하여 있을 수 없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대로 법의 뜻이 모두 공하여 행함이 없는 데에 들어가지만 가지가지의 업을 잃지 않으며 주체와 대상이 없으며, 주동과 피동[能所]의 신견(身見)51)과 안과 밖의 번뇌[結使]가 모두 고요해졌으므로 가지가지의 서원[願] 역시 멈추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치로 관(觀)하는 지혜와 선정과 진여를 세존께서는 항상 말씀하셨으니, 진실로 공한 법[空法]이 바로 훌륭한 약(藥)인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왜냐 하면 법의 바탕은 공하기 때문이니라. 공의 바탕은 생김이 없기 때문에 마음도 항상 생김이 없으며, 공의 바탕은 소멸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도 항상 소멸함이 없으며, 공의 바탕은 머묾이 없기 때문에 마음도 머묾이 없고, 공의 바탕은 조작함[爲]이 없기 때문에 마음도 역시 조작함이 없느니라. 공은 나가고 들어옴이 없어서 가지가지의 얻고 잃음을 떠나며, 5음 18계 6입 등이 모두 없나니, 마음이 여여하여 집착하지[着] 않는 것 또한 이와 같으니라. 보살이여, 나는 가지가지의 공한 가르침을 설하여 가지가지의 있다는 견해[有]를 부수기 때문이니라.”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있다는 것이 실답지 않기를 알되 아지랑이가 물이 아닌 것과 같이 알고, 실상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되 불의 바탕이 생기지 않는 것같이 알아야 하나니, 이와 같이 관찰[觀]하면 이 사람은 슬기롭다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왜냐 하면 이 사람은 참다운 관(觀)으로 하나의 적멸을 관찰하되 모습과 모습 아닌 것을 평등하게 공으로 인정하여 공을 닦으므로 부처를 보는 데 실패하지 않으며, 부처를 보기 때문에 세 가지 흐름[三流]에 따르지 않느니라.

대승 가운데서 3해탈도(解脫道)는 하나의 몸이요 자성이 없느니라.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空)이며, 공하기 때문에 모습이 없고, 모습이 없기 때문에 만드는 것이 없으며, 만드는 것이 없기 때문에 희구하는 것이 없으며, 희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서원[願]이 없나니, 바람[願]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로써 행업(行業)을 알기 때문에 반드시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하며,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부처를 보게 되며, 부처를 보기 때문에 미래에는 정토(淨土)에 태어나게 되느니라. 보살은 이 깊고 깊은 법에서 세 가지의 교화[三化]로써 부지런히 닦아 지혜와 선정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므로 3계를 뛰어넘느니라.”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생김도 없고 소멸함도 없다는 것은 바로 무상52)하다는 것입니다. 이 생기고 없어지는 것[生滅法]을 없애되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 완전히 소멸하여 버리면 적멸로 항상함을 삼는 것이니라. 항상하기 때문에 단멸하지 않거니와 이 단멸하지 않는 법은 3계의 가지가지,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법[動不動法]을 떠나는 것이니라. 유위법(有爲法)에서 마치 불구덩이를 피하는 것과 같은데, 어떠한 법에 의지해서 스스로 책망하고 꾸짖어야 저 유일한 문에 들어가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저 세 가지 중대한 일에서 그 마음을 꾸짖고 책망하며, 세 가지 큰 진리에서 그 행에 들어가게 되느니라.”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어떠한 것을 세 가지 일에서 그 마음을 꾸짖는 것이라 하고, 어떠한 것을 세 가지 진리에서 유일한 행에 들어간다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 중대한 일이란, 첫째는 인(因)이요, 둘째는 과(果)요, 셋째는 식(識)이니라.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은 본래부터 공하여 나 아닌 것과 참다운 나[眞我]가 없거늘, 어찌 이것에 애착하고 물드는 마음을 낼 것인가? 이 세 가지 일에 얽매여 고해(苦海)에 표류하는 것이라 관찰하고, 이러한 일로 항상 스스로 꾸짖고 책망해야 하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