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론(涅槃論)
바수반두(婆藪槃豆) 지음 / 달마보리(達磨菩提) 한역
정각해(淨覺海)에 이마를 땅에 대어 예배하고
감로문에 주지(住持)하며
또한 부사의(不思議)한
자성청정장(自性淸淨藏)께 예배합니다.
세상을 구하는 모든 제도(濟度)의 문은
진실한 제도(諦道)에 나아가는 것이고
아울러 배움답게 배워서
법답게 실다운 뜻을 증득하며
오래도록 헤매는 창생(蒼生)을 불쌍히 여겨
자비(慈悲)를 담아서 세간에 전합니다.
최초의 여시(如是)로부터 유혈쇄지(流血灑地)에 이르기까지를 부사의신통반시분(不思議神通反示分)이라 이름하며, 순타애탄(純陀哀歎)의 2품을 성취종성견집분(成就種性遣執分)이라 이름한다. 제3의 고(告)로부터 이후의 대중문품(大衆問品)에 이르기까지를 정법실의분(正法實義分)이라 이름하고, 오행십공덕(五行十功德)은 방편수성분(方便修成分)이라 이름한다. 사자후품(師子吼品)은 이제방일입증분(離諸放逸入證分)이라 이름하며, 가섭품(迦葉品)은 자광선교주지분(慈光善巧住持分)이라 이름하고, 교진여품(憍陳如品)은 현상분(顯相分)이라 이름한다.
어떻게 장수금강불괴신(長壽金剛不壞身)을 얻는 것인가?
가섭이 중생과 함께 똑같이 듣고자 하는 까닭에 물은 것이다. 대답은 “나는 3업(業)을 닦는 까닭에 장수를 얻는다”고 하였다.
무엇이 금강불괴신인가?
일체중생이 모두 파괴되어 없어지는데, 어찌 무너지지 않음[不壞]을 얻는가를 묻는다면, 앞서 행하는 바와 같이 해서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무엇이 견고한 힘인가?
마음에 분별이 없는 까닭에 견고함을 얻는다.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는 까닭에 장수(長壽)이다. 가히 설할 수 없는 까닭에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고, 유동(流動)이 없는 까닭에 견고함이다.
어떻게 장수를 얻는 것인가?
금강불괴신인 까닭에 장수를 얻는다.
어떻게 무너지지 않는가?
견고한 힘을 얻는 까닭에 무너지지 않는다.
가섭은 중생을 위해 하나도 남김없이 묻고 완전히 답하였다. 법상(法相)이 다함이 없는 까닭에 묻는다.
원컨대 부처님이시여, 미묘한 비밀[微密]을 열어서 널리 중생을 위해 설하소서.
무엇이 미묘한 비밀인가?
몸 밖에 부처가 있는 것 또한 비밀[密]이 아니며, 몸 안에 부처가 있는 것도 또한 비밀이 아니다.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것 또한 비밀이 아니다. 중생이 부처인 까닭에 미묘한 비밀이다.
어째서 중생이 곧 부처라 하는가?
중생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비유(非有)도 아니며, 비무(非無)도 아니다. 이러한 까닭에 중생은 부처이다.
어떻게 광대(廣大)를 얻음이 중생을 위해 의지(依止)가 되는 것인가? 어떠한 까닭에 광대라 이름하는 것인가?
식별의 상(相)이 있지 않고, 부처가 아님이 없고, 행이 청정하지 않음이 없고, 덕이 원만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중생을 위해 의지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 석가를 보고서 의지한다는 것은 의지라 이름하지는 않는다. 소승이 이해하는 뜻에서는 자비로운 까닭에 중생으로 하여금 의지하게 한다.
실제로 아라한은 아니지만 나한 등과 같은 사람이란 옛날에는 왕궁에서 태어나 아라한이 된다고 교시하였지만, 지금은 왕궁에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쌍림(雙林)에서 멸한 것도 아닌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나한이 아니면서 나한 등과 같다고 하는가?
가섭이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우치지 못하여 네 가지 의지(依止)를 묻지 않고, “여래가 만약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고 쌍림에서 멸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계를 얻어 네 가지 과보를 말미암지 않아서 실로 아라한이 아닌데, 어찌 여래ㆍ나한 등과 같은가?”를 물었는데, 이를 풀이하기를 “만약 여래가 실로 아라한이라면 네 가지 의지는 나한과 더불어 같을 수 있지만, 부처가 실로 나한이 아니라면 어찌 나한과 더불어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석가의 몸에는 두 가지 이름이 있는데, 하나는 응래(應來)이며, 또 하나는 보살실행(菩薩實行)이다. 응(應)이라 하는 것은 연화장세계로부터 대장엄불이 된 것으로서 태자로 왕궁에서 태어나 쌍림에서 멸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보살의 유희법(遊戲法)이다. 둘째로 진(眞)이란 오는 곳이 없는 것이다.
무엇이 나한과 같은 것인가?
부처에는 두 가지의 이름이 있으니, 하나의 진불(眞佛)이 화현하여 성문의 아라한과 동일하지만 부처는 실제로 성문이 아니니, 어찌 넷의 성문과 같겠는가? 풀이하면, 이전에는 실로 아라한이 있어서 나와 나한을 같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예전에 일찍이 나한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한은 나의 몸이 스스로 지은 것인데 어찌 같겠는가? 또 풀이하면, 석가의 몸을 아라한이라 이름하는데, 성지(性地) 보살을 어찌 나한과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 실행(實行) 보살이 마땅히 와서 또한 능히 부처로 화현한 것이니, 석가는 실로 아라한이었다면 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 석가가 일찍이 나한이 아니었다면 어찌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바로 성지 보살은 아라한이고, 아라한은 보살이지 실제로 부처는 아니다.
나한이 어찌 부처와 같겠는가? 석가가 실로 아라한이었다면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석가가 나한이었던 적이 없는데, 어떻게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바로 실행 보살은 아라한이고, 이러한 까닭에 왕궁에서 태어나 쌍림에서 멸한 것이니 모두 유희로서 보살이 나타내 지은 것이다. 전에는 실로 아라한이 없었고 나의 화현을 말미암아 중생이 아라한을 얻으니, 이러한 까닭에 내가 아라한을 지은 것이다.
둘째로 연화장세계의 보살이 화현한 것은 나와 다름이 없다. 이러한 까닭에 실제로는 아라한이 아니고 나한과 같은 것이다. 만약 내가 실제로 나한이라면 보살은 나와 같을 수 있다. 나를 나한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보살의 법상(法相)이 화현해 통한 것이 아니라서 모두 진실한 이해가 아니다.
네 가지 의(依)란 환희지(歡喜地)가 초의(初依)이며, 6지(地)가 제2의이며, 8지가 제3의이며, 법운지(法雲地)가 제4의이다. 성문을 화현함은 성문의 허망한 단면(斷面)이라서 아라한이었던 적이 없으니, 어찌 같다고 하겠는가? 보살은 이름하여 법불(法佛)이라고도 하며 연불(緣佛)이라고도 한다.
무엇이 법불인가?
법으로부터 생겨나 법을 행하고 견(見)을 얻는 까닭에 이름하여 법불이라 한다. 무엇이 연불인가? 연이 있는 까닭에 보는 것을 연불이라 이름한다.
【문】 가섭의 뜻이 만약 스스로의 이해가 이와 같은 물음을 필요치 않고,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면, 어찌 이와 같이 묻겠는가?
【답】 가섭은 이 열두 동자와 여래의 위신력으로 가르침을 더하는 까닭에 능히 물을 수 있는 것이며, 가섭이 묻는 바는 바로 열반과 다름이 없다.
천마(天魔)가 중생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이것을 풀이하면, 가섭은 바로 여래의 몸을 묻는 것이지 미래를 묻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중생의 몸은 어찌하여 외마(外魔)가 와서 어렵게 만드는지를 스스로 믿지 못한다. 여래는 지금 보리수 아래에서 비로소 성불하여 정법을 장차 진흥시키려고 하는데, 마군은 그 무리들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에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무엇이 모든 조어(調御)의 마음으로 진제(眞諦)를 기뻐하며 설하는 것인가? 무엇을 이름하여 조어라 하는가?
범부 중생은 아는 바가 없어서 대승을 들으면 이것은 대승, 소승을 들으면 이것은 소승, 고(苦)를 들으면 이것은 고, 낙(樂)을 들으면 이것은 낙이라 한다.
어떻게 조어라 이름하는가? 고가 아닌데 고를 설하며, 낙이 아닌데 낙을 설하며, 상(常)이 아닌데 상을 설하며, 지난날 소(小)를 설하고 지금은 대(大)를 설하면, 또한 마음으로 진제를 기뻐하며 설하는 것이라 이름하지 않고 조어라고 이름하지도 않는다. 지금 무상(無常)을 무상이 아니라고 설하며, 고락을 고락이 아니라고 설하며,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다고 설하는 것, 이것을 설하여 진제라 한다.
정선(正善)을 구족하게 성취하며, 네 가지 전도(顚倒)를 연설한다. 정선을 구족하게 성취한다고 하는 것은 보살이 4무량심ㆍ10바라밀을 행하여 평등하지 않음이 없는 것으로서 이것을 상중정선(相中正善)이라 이름한다. 보살의 행은 정선이 아님이 없다. 성문은 나와 남이 있는 까닭에 정선이라 이름하지 않고, 보살은 나와 남이 없는 까닭에 정선이라 이름한다. 둘째로 정선이란 예전의 가르침은 옳지 못해서 성문은 구족하게 성취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열반의 이치가 올바른지라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으며, 생기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으므로 이름하여 정선을 구족하게 성취한다고 한다.
셋째로 환희지로부터 위로 법운지(法雲地)에 이르기까지를 이름하여 구족하게 성취한다고 한다. 네 가지 전도를 연설한다고 하는 것에서 성문인이 말하는 아(我)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고 부처는 고공무상(苦空無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전도이다. 성문은 고공무상이고 부처는 상락아정이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전도이다. 부처는 상락아정이고 중생은 고공무상이라고 하는 것도 전도이다.
여래가 성문을 위해 설한 네 가지 전도란 무엇인가?
네 가지 전도가 부전도(不顚倒)임을 올바로 설해서 다시 외법(外法)은 전도ㆍ부전도가 없음을 설한 것이니, 이것을 마음으로 진제를 기뻐하며 설하는 것이라 이름한다.
경에서 설하기를 “법은 유도 아니며, 무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진제라 이름한다”고 한다.
무엇이 여러 보살이 능히 보기 어려운 성(性)을 보는 것인가?
가섭에게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불성이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며, 둘째는 불성을 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지견(知見)을 사용하지 않고 여래의 깊은 불성을 이해하게 할 수 있는가?
어떠한 까닭에 깊다고 하는가? 불성은 가히 짓거나 만들어지거나 닦거나 얻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으로 깊다고 한다. 성문은 협소하여 궁극적이지 못하며 능히 보지 못하지만, 보살은 자비를 행해 널리 구제하지 견[見]을 구하지 않는다. 중생을 위하고 속박을 받는 까닭에 보기 어렵다[難見]라고 한다. 두 번째의 풀이는 불성은 가히 견법(見法)이 아니니, 능견(能見)ㆍ소견(所見)ㆍ능지(能知)ㆍ소지(所知)ㆍ능수(能修)ㆍ소수(所修)가 아닌 까닭에 능히 보기 어려운 성(性)을 본다고 이름한다.
무엇이 만자(滿字)와 반자(半字)의 뜻을 이해하는 것인가?
반자란 점교(漸敎)이며, 만자는 열반이다. 만족교(滿足敎)인 까닭에 만자라 하며, 부처님 가르침의 과보와 공덕을 모두 포섭하는 까닭에 만자라 한다. 성문ㆍ연각의 가르침은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반자라 한다. 열반은 돈(頓)이라고도 하고 점(漸)이라고도 한다. 지금 열반의 2제상대(諦相對) 가운데 만(滿)을 논하는데, 그 행에 대하여 만과 불만(不滿)이 있는 까닭에 점교라 하지 이(理)에 대해서는 만과 불만이 없다. 이러한 까닭에 열반을 점교라 하고, 반자의 형태로 열반을 돈교(頓敎)라 한다. 둘째로 또 만반(滿半)이라고 말하는 것은 중생의 망상이다. 이(理)는 만ㆍ불만이 아니니, 이 때문에 열반을 점교라 한다. 어찌하여 모든 보살은 능히 어려움을 보고 성품을 보는 것인가? 이것은 단지 법을 보는 것이다. 또 무엇이 만자와 반자의 뜻을 이해하는 것인가 하면, 이제 다시 견(見)ㆍ불견(不見)이 없는 것이다.
무엇이 공성행(共聖行)으로 사라사조(娑羅娑鳥)와 같은 것인가?
여래가 왕궁에서 부인과 아들을 둔 것이나, 혹은 출가하여 성문과 함께 한 것은 비유하면 사라사조가 함께 무리를 이루어 서로 분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성자 여래는 일체중생과 함께 닦고 함께 행하는 까닭에 “무엇이 공성행으로 사라사조와 같은 것인가?”라고 말한 것이다. 둘째로 풀이하면, 색(色)은 성인이 되며, 성문의 색심(色心)은 성인이 되며, 보살성인(菩薩聖人)은 심색(心色)이 아니다. 심색이 있다고 말하는 까닭에 성인이 아닌 것이다. 성문성인은 형색(形色)을 함께 하며, 보살성인은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의 심식(心識)이 없다. 이(理)는 심식을 공유하는데, 범부는 심식이 없는 성인인 까닭에 성인이라 한다.
사라사조라는 것은 총체적인 명칭이다. 비유하면 여래가 일체중생과 함께 해도 분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가린제(迦隣提)란 열반이 일체중생과 다름을 비유한 것으로 도리어 성문을 떠난다는 의미이다.
보살은 여래와 일체중생이 무차별인 것을 아는 까닭에 공(共)이라 한다.
서로 버리고 여읜 것이 있음을 풀이하면, 여래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범(凡)과 성(聖)이 있어서 서로 버리고 여읜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면 일체중생을 서로 버리고 여읨이 없다고 하는 것이 성문의 뜻이다. 보살은 서로 버리고 여읨이 없다는 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지 않아도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않고 세상에 나오더라도 서로 여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제(世諦)에는 고공무상(苦空無常)이 없으며, 제일의제(第一義諦)에는 상락아정이 없는 것을 풀이한다. 어떤 사람이 세제에 상락아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천박하게 뜻을 이해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이 세제는 있고, 이 제일의제는 없으며, 세제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제일의제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한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아서 다시 외부의 법이 없는 까닭에 공성행이라 이름한다.
가린제ㆍ일월ㆍ태백(太白)과 세성(歲星) 중에서 무엇을 일월이라 하는가?
이 일월이란 범부는 일월이 출몰하는 것을 보지만, 성인은 일찍이 출몰을 본 적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둘째로 성문인은 부처가 왕궁에서 태어나 쌍림에서 멸한 것을 보지만, 보살은 일찍이 왕궁에서 태어나거나 쌍림에서 열반에 든 것을 보지 않는다. 셋째로 일월이 사라지기 때문에 태백과 세성이 나와서 세상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여래가 열반에 들면 성문ㆍ연각이 나온다. 법과 여래가 다른 까닭에 별이 나온다고 말하는데, 중생은 망상으로 일월과 세성에 출몰이 있다고 보지만 실은 출몰이 없다. 중생은 여래가 생멸이 있다고 보지만 실은 여래에게는 생멸이 없다.
무엇을 아직 발심하지 않았는데도 보살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성문에게는 발(發)과 불발(不發)이 있으며, 연각에게도 발ㆍ불발이 있으며, 보살에게도 발ㆍ불발이 있다.
이 세 종류의 보살을 발심이라 한다. 어떻게 발심이란 것은 과가 다른데 발심이라 할 수 있겠는가? 여래는 처음부터 중생에 발ㆍ불발이 있다고 가르친다. 옛 가르침에는 발(發)이 있다 하더라도 발이라 이름하지 않았다.
무엇을 발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 얻을 수 있고 구할 수 있는 차별이 부처와 다르다고 보는 것을 발이라 하지 않는다.
무엇을 발이라 하는가? 지금 무상열반(無相涅槃)의 이치가 훈습하는 것을 설하는 까닭에 일체로 하여금 발하게 하는 것을 이름하여 발이라 하는데, 성문ㆍ연각에게는 있지 않다. 보살에게는 발ㆍ불발이 있는 까닭에 아직 마음을 발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보살이라 이름한다. 열반이 평등하게 일체를 비추는 까닭에 일체가 발심하지 않음을 모두 보살이라 이름한다.
가섭은 무슨 까닭에 “어찌하여 아직 발심하지 않았는데 보살이라 이름하는가?”라고 물었는가?
발심자는 일월을 보지만 발심하지 않은 자는 일월을 보지 못한다. 둘째로 발심자는 상주(常住)를 보지만 발심하지 않은 자는 보지 못한다. 예전에 여래가 세상에 나왔을 때 발ㆍ불발이 있었는데, 발이란 견(見)이고 불발이란 불견(不見)이었다. 지금 열반이 평등하게 비추면, 발은 발이기도 하고 또한 불발이기도 하다.
어떻게 대중에게서 무소외(無所畏)를 얻는 것인가?
보살이 세상에 출현해서 자비와 평등으로 중생상(衆生相)을 파괴하지 않는 까닭에 무소외라 한다.
보살은 두려움이 없고 중생 또한 두려움이 없다. 왜 중생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가?
보살은 세상에 출현해서 중생상을 파괴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중생 역시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래가 세상에 출현해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4무량심으로써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며, 따라서 천마(天魔)ㆍ외도(外道) 나아가 일천제(一闡提)도 없다. 마치 한 자식을 생각해 두려움이 없는 것과 같다.
어떠한 까닭에 중생에게 두려움이 없는 것인가?
일체중생이 여래를 마치 부모와 같이 보는 까닭에 두려워하는 바가 없다.
어떠한 까닭에 천제(闡提)라 이름하는가?
부처도 알지 못하고 내외도(內外道)를 알지 못하므로 일천제라고 이름한다.
“일천제는 내외를 알지 못하지만, 보살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묻는데, 이를 풀이하여 말하면, “보살은 내외를 알지 못하더라도 죽이지 않지만 일천제는 알지 못하는 까닭에 죽인다. 마치 염부금(閻浮金)이 능히 그 과실을 설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니. 이는 대중과 조화한다[和衆]는 뜻으로 해석한다.
염부단금(閻浮檀金)에는 네 종류가 있다. 네 종류는 무엇인가?
첫째는 청(靑)이며, 둘째는 황(黃), 셋째는 적(赤), 넷째는 자마(紫磨)이다. 청은 외도를 비유한 것이고, 황은 성문ㆍ연각을 비유한 것이며, 적은 6바라밀 보살을 비유한 것이며, 자마는 여래를 비유한 것이다. 염부금에는 또한 청ㆍ황ㆍ적ㆍ백이 있으며, 네 종류의 갖가지 색이 있다. 둘째로 세간의 좋은 물건[好物]이 비록 또 단정하더라도 나쁜 점이 있다. 염부금은 이와 같은 물건이 아니므로 그 허물을 설할 수 없다. 여래가 열반을 얻고 갖가지 성문ㆍ외도ㆍ6바라밀의 보살을 비유한 것이니, 마치 염부금이 그 허물을 설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자마금(紫磨金)의 갖가지 색을 갖춘 것은 열반을 갖춘 천마ㆍ외도ㆍ성문ㆍ연각ㆍ6바라밀 보살을 비유한 것이다. 어떠한 까닭에 이와 같은가?
이것 외에 달리 다른 법이 없기 때문이다. 자마금은 일체를 구족하여 모든 색으로 말할 수 없으니, 성문ㆍ연각ㆍ6바라밀ㆍ외도 등 갖가지가 있는 까닭에 말할 수 없다. 열반의 이치는 청ㆍ황ㆍ적ㆍ백의 법이 아니더라도 또한 청ㆍ황ㆍ적ㆍ백인 까닭에 말로 할 수 없으니, 가령 청ㆍ황ㆍ적ㆍ백이 있어서 그 과실을 설하더라도 이 청ㆍ황ㆍ적ㆍ백은 일찍이 있은 적이 없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
어떻게 탁세(濁世)에 처해서 연꽃처럼 오염되지 않겠는가?
탁세란 5탁(濁)이다.
무엇이 5탁인가?
겁탁(劫濁)과 번뇌탁(煩惱濁) 등이다. 석가는 5탁에 출현해서 왕궁에서 태어났고 처자가 있는 것이다. 금은 등 일곱 가지 보물의 갖가지 재물을 모두 이름하여 탁이라 하는데, 그에 오염되는 바가 없는 까닭에 이름하여 탁세에 처해 오염되지 않는 것이 연꽃과 같다고 한다. 둘째로 3승의 법을 이름하여 탁이라 한다. 지금 열반은 3승에 오염되는 바가 아닌 까닭에 오염되지 않는다고 한다.
무엇이 번뇌에 처해 번뇌에 능히 물들지 않는 것이, 의원이 중생의 병을 치유하더라도 병에 오염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인가?
가섭이 물은 뜻은 여래에 의거한다. 삼계의 번뇌와 98사(使)도 여래가 세상에 나왔을 때 그를 오염시키지 못하지만, 일체중생은 삼계의 번뇌와 98사에 오염된다. 둘째로 성문ㆍ연각ㆍ6바라밀은 번뇌를 끊어야만 하고 불과(佛果)를 얻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번뇌에 오염된다. 셋째로 10지 보살은 행으로 대지(大智)에 통달하는 까닭에 번뇌에 오염되지 않는다.
넷째로 대보살은 과를 바라는 까닭에 또한 번뇌에 오염된다. 지금 열반은 인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에 오염되지 않는다. 다섯째로 4제(諦)의 가르침에서 나아가 반야바라밀과 법화 또한 번뇌에 오염된다. 지금 열반의 이치는 유동(流動)이 없고 득실(得失)이 없으며 기멸(起滅)이 없는 까닭에 오염되지 않는다. 마치 의원이 중생의 병을 치료하더라도 병에 오염되지 않는 것과 같다.
여래는 세상에 나와 처음에 3귀(歸)ㆍ5계(戒)로부터 보살계에 이르기까지 탄지저두(彈指低頭)의 점교(漸敎)로써 중생의 병을 교화ㆍ치료하면서 번뇌를 아는 까닭에 병에 오염되지 않는다. 중생은 번뇌를 모르는 까닭에 항상 병에 오염된다. 두 번째의 차제교(次第敎)도 중생의 병을 고친다고 이름한다. 세 번째는 역교(力敎)라 이름하는데, 신통변화의 몸으로 일체를 항복시키는 까닭에 또한 중생의 병을 치료한다고 이름한다. 네 번째로 지금 설하는 열반은 앞의 별교(別敎)의 걱정[患]을 치료하는 까닭에 중생의 병을 치료한다고 한다.
무엇을 걱정이라 하는가?
일체중생이 아직 발심하지 않은 것을 걱정이라 한다. 다시 풀이하기를, 장육(丈六)이 발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열반이 평등하게 비추어 발심시키는 까닭에 중생의 병을 치료한다고 이름한다.
생사의 대해 가운데 어떻게 선사(船師)가 되는가?
삼계를 생사라 이름하며, 여래가 세상에 나오는 것도 생사라 한다.
어떠한 까닭에 생사라 이름하는 것인가?
여래의 법은 능히 중생을 제도하여 태어나거나 죽지 않게 하는 까닭에 생사의 대해에 선장이 된다고 한다. 둘째로 장육이 차제법(次第法)과 나아가 법화(法華)까지 설하는 것도 생사라 이름한다. 법이 지금 열반을 설하여서 옴도 없고 감도 없고 생함도 멸함도 없이 예전 생사의 가르침을 제도하는 까닭에 선장이라고 한다. 처음에 장육은 불생사이고 가르침은 불생멸이라고 풀이하였다. 둘째로 장육 및 가르침도 생사이지만, 열반에는 생멸이 없다.
셋째로 부처님 멸도 후 누가 능히 생사를 넘는가? 오직 대보살만이 능히 생사를 넘는다. 넷째로 보살 또한 능히 넘지 못하고, 대열반의 이치만이 능히 생사를 넘을 수 있다. 비유하면 세간의 선장은 방편을 잘 이해하여 능히 바다의 어려움을 아는 것과 같다. 번뇌는 대해이고 삼계는 배가 되며, 여래가 갖가지 방편으로 설한 3승의 법이 선장이 된다. 세간의 선장은 인(因)을 지시하고 과(果)를 지시해 중생을 배에 오르게 하며, 여래는 방편으로 3승법을 설해 인을 설하고 과를 설한다. 말이 삼계를 벗어난 자도 여전히 생사이니, 이러한 까닭에 삼계로서 배를 삼는 것이다. 최초의 차제교는 생사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까닭에 선사가 되고, 법화(法華)는 만행(萬行)으로써 선장이 된다.
지금 열반은 생사가 없는 것으로 배를 삼는다. 무엇으로써 병에 오염되는 것을 보이는가? 또 생사의 대해에서 어떻게 선장이 되는가?
앞서 번뇌를 떠나고 또 번뇌의 대해 가운데 배가 되어서 피안에 도달하게끔 한다.
생사를 버리는 것이란 무엇인가? 뱀이 허물을 벗는 것과 같은 것인가?
가섭이 묻기를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여 태어나고 죽다가 지금 열반도에 들어가면서 ‘나는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이 마치 뱀이 허물을 벗는 것과 같아서 생멸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라고 했다.
차제(次第)로 장육이 설한 것은 생사법이고 지금은 열반의 불멸을 설한다. 앞의 차제의 가르침에서 이 가르침은 이치가 없는 것이 마치 뱀이 옛 껍질을 벗는 것과 같아서 이득도 없고 공덕도 없으며, 지금의 열반은 생도 없고 멸도 없으며 또한 가르침을 파괴하지도 않는다. 둘째로 일체중생에서 나아가 언설ㆍ불언설에 이르기까지 형체가 있는 종류는 모두 공(空)이라 이름하고, 오직 열반만이 진실의 도리이다.
“3보(寶)를 관하는 것이 오히려 천의수(天意樹)와 같다”고 함은 무엇인가?
삼보는 궤칙(軌則)이라고 하는데, 여래가 출세하여 3보가 있음을 나타내 보인다. 3보가 있는 까닭에 3귀를 받고 5계를 얻으며, 또한 손가락을 튀길[彈指] 동안의 시간을 얻기도 하고, 뜻에 따라 수행하는 바와 뜻에 따라 얻는 바를 얻기도 한다.
여래는 또한 여의삼보(如意三寶)라 이름하며, 또한 여래여의(如來如意)ㆍ중생여의(衆生如意)라 이름한다. 무엇이 중생여의인가?
뜻에 따라 3귀ㆍ5계를 받고 나아가 보살이 남김없이 과보를 얻는 까닭에 중생여의라 이름한다. 여래여의란 중생을 근기에 따라 느끼는 까닭에 여의라 이름한다. 지금 열반여의라 말하는 것은 일체의 고통과 즐거움, 선과 악이 이치가 아님이 없는 까닭에 여의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3보를 관하는 것이 오히려 천의수와 같다는 것은 비유컨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있는 한 나무가 능히 여러 천(天)의 뜻에 따라 얻는 바가 있는 까닭에 여의수라 한 것과 같다. 여러 천이 이미 오랫동안 행을 닦았으므로 이 나무도 감득(感得)한다. 3보도 이와 같으니, 중생이 오랫동안 행을 닦은 까닭에, 또 장육도 감득하는 까닭에 3보가 오히려 천의수와 같다고 이름한다.
3승이 만약 성(性)이 없다면 어떻게 3승이라 설할 수 있겠는가?
여래는 하나의 법을 설하는 것이 아니다. 3승이란 중생의 근기인 까닭에 일음(一音)의 설을 부류에 따라 이해한다고 설한다. 여래가 3승을 설하더라도 설이라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중생의 근기에 따르는 까닭에 소승도 있고 대승도 있으니, 여래가 3승을 설하더라도 여래의 본뜻은 아니다.
무엇이 여래의 본뜻인가?
열반이 그것이다. 가섭이 물은 뜻은 ‘3승이 만약 성품이 없다면 어떻게 설할 수 있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여래가 답한 뜻은 일체제불은 중생을 위해 3승을 설한 것은 아니니, 지금 열반의 실상은 소승이면서 소승이 아니며, 대승이면서 대승이 아니라고 한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3승교는 1상(相)이라서 대승과 소승이 있지 않다. 셋째로 열반의 이치를 설하는 곳에는 대승을 말하지도 않고 소승을 말하지도 않으니, 중생의 지(智)에 차별이 있는 까닭에 가르침에 차별이 있다. 이치에는 대승과 소승의 차별이 없는 까닭에 대승과 소승이라 설할 수 있는 것이다. 향함과 차별함이란 실제로는 차별이 없으며, 나아가 외적인 차이도 없다.
오히려 낙(樂)이 아직 생기지 않은 것과 같은데, 어떻게 낙을 받았다고 이름하는가?
가섭이 물어 말하기를 “중생이 낙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낙을 받는 것을 설하는가?”라고 하였다. 범부는 고(苦)가 있고 낙이 없으며, 보살은 낙이 있고 고가 없다.
어떻게 낙이 있는가?
보살은 지(智)에 통달하여 과(果)에 이르는 까닭에 낙을 알지만, 중생은 모르는 까닭에 고가 있다. 보살은 과를 알아서 보살의 낙은 낙이 아니라고 말하거나 중생의 고는 고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는 모두 허망하기 때문이다.
열반은 고도 없고 낙도 없는 까닭에 이름하여 대락(大樂)이라 하는데, 낙이 아직 생기지 않았는데 어떻게 낙을 받는다고 할 수 있는가?
여래가 사라림(娑羅林)에서 법을 설하여 묻기를, “어찌하여 불순계(不純戒)ㆍ지득복계(持得福戒)ㆍ부득복계(不得福戒)ㆍ외도(外道)는 불계(佛戒)가 아닌가?”라고 했을 때,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앞의 것은 잡교(雜敎)이며, 이것은 열반이다. 게다가 외도의 열반이란 없다”라고 하셨다.
어찌하여 여러 보살이 중생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첫 번째 해석으로는 성문ㆍ연각ㆍ6바라밀 보살 내지 외도는 나와 남이 있고 증득이 있는 까닭에 이름하여 중생을 파괴한다고 한다. 둘째로 보살은 비밀히 행하고 비밀히 가르쳐서 중생의 근성을 알아 중생의 상(相)을 파괴하지 않는 까닭에 파괴라 이름한다. 보살이 파괴하지 않는 바라고 하는 것은 능히 파괴하는 것이다. 능히 파괴하지 않는 것은 보살이 아니니, 능히 이와 같은 법을 지어서 법상(法相)을 거스르지 않는 까닭에 중생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한다.
셋째로 보살은 열반에 청ㆍ황ㆍ적ㆍ백이 없고 나와 남이 없음을 아는 까닭에 이름하여 중생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한다. 넷째로 파괴하지 않는다는 것은 열반의 이치가 얻는 것도 아니고 증득하는 것도 아니고 만드는 것도 아니고 짓는 것도 아닌 까닭에 중생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다섯째로 진리는 중생을 파괴하지 않고, 중생 역시 이치를 파괴하지 않는다.
어째서 이와 같은 것인가?
중생은 이치[理]이고 이치 외에 다시 중생이 없는 까닭에 중생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하여 타고난 맹인을 위해 눈이 되어 인도하는 것인가?
가섭은 “어찌하여 눈이 되어 인도하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첫 번째 해석은 앞서 가르친 성문ㆍ연각ㆍ6바라밀이 그 상(相)에 따라 이해하는 것을 눈멀었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가 성문ㆍ연각ㆍ6바라밀을 이해하는데, 만약 일찍이 얻은 바가 있다면 이것은 눈을 떴다고 할 수 없지만 이 법이 일찍이 있었기 때문에 눈을 뜬 것이다. 비유하면 눈먼 사람이 청ㆍ황ㆍ적ㆍ백을 알지 못해서 어떤 사람이 청ㆍ황ㆍ적ㆍ백을 말하면 도리어 미망에 빠지지만, 만약 청ㆍ황ㆍ적ㆍ백이 없다고 말하면 이해하는 것과 같으니, 이를 이름하여 눈을 뜬 비유라고 한다. 3승의 사람에게는 분명히 인과 과가 있는 차별이 있고 얻음과 얻지 못함이 있다. 지금 말하는 열반에 만약 장(長)이 있고, 단(短)이 있고, 득이 있고, 부득이 있다면 미망에 헤매는 것이지만, 열반은 청ㆍ황ㆍ적ㆍ백이 없고, 득도 없고 증(證)도 없으며, 장도 없고, 단도 없는 까닭에 이름하여 눈이 열림[開]이라 한다.
장육의 수도(修道)ㆍ지계(持戒)ㆍ보시(布施)를 인하는 것은 인이 아니다. 불성의 얻음도 없고 닦음[修]도 없음을 인하는 것을 이름하여 인이라 한다. 일체 중생은 3승의 사람을 봄으로써 법으로 삼지만, 3승의 사람은 청맹(靑盲)이라 이름한다. 단지 3승의 사람뿐만 아니라 일체중생도 또한 청맹이다. 법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며, 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열 수 없는 것도 아니며,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가르침 때문에 청맹이라고 설하지만, 이치로는 청맹ㆍ무청맹을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청맹ㆍ불청맹을 말하더라도 법상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이 두 가지로 있은 적도 없고[不曾有] 없은 적도 없음[不曾無]을 말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있음과 있지 않음[有不有]ㆍ없음과 없지 않음[無不無]ㆍ열림과 열리지 않음[開不開]을 설하는 것인가? 모두 거스르지 않는 까닭에 열림이라고 한다.
무엇이 많은 방면[多頭]을 보이는 것이며, 오직 대선(大仙)이 설함을 원하는 것이라 하는가?
가섭이 물은 뜻은, “여래는 처음에 갖가지 많은 방면[多頭]을 가르쳤지만, 지금 열반은 무슨 까닭에 오직 하나이며 둘이 아니라고 설하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여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의 많은 방면이 아니다. 중생이 옛날 많은 근(根)을 행했으니, 이러한 까닭에 많은 방면을 설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래서 많은 방면을 보였다고 말한 것이다. 둘째로 법의 많음[多]이다. 무엇을 많음이라 하는가? 법상이 이와 같이 많은 방면을 보이는 것이다. 셋째로 연유하는 설이 많은 것이다. 이 법이 만약 있다면 다설(多說)이라 이름하지만, 이 법은 일찍이 없었던 까닭에 다설이라 하지 않는다. 넷째로 열반의 이(理)와 상(相)은 이와 같이 많음도 많지 않음도 아니다. 다섯째로 참된 이치의 본말(本末)은 유무의 법이 아니니, 이러한 까닭에 설하든 설하지 않든 방해되지 않는다.
열반론(涅槃論)
바수반두(婆藪槃豆) 지음 / 달마보리(達磨菩提) 한역
정각해(淨覺海)에 이마를 땅에 대어 예배하고
감로문에 주지(住持)하며
또한 부사의(不思議)한
자성청정장(自性淸淨藏)께 예배합니다.
세상을 구하는 모든 제도(濟度)의 문은
진실한 제도(諦道)에 나아가는 것이고
아울러 배움답게 배워서
법답게 실다운 뜻을 증득하며
오래도록 헤매는 창생(蒼生)을 불쌍히 여겨
자비(慈悲)를 담아서 세간에 전합니다.
최초의 여시(如是)로부터 유혈쇄지(流血灑地)에 이르기까지를 부사의신통반시분(不思議神通反示分)이라 이름하며, 순타애탄(純陀哀歎)의 2품을 성취종성견집분(成就種性遣執分)이라 이름한다. 제3의 고(告)로부터 이후의 대중문품(大衆問品)에 이르기까지를 정법실의분(正法實義分)이라 이름하고, 오행십공덕(五行十功德)은 방편수성분(方便修成分)이라 이름한다. 사자후품(師子吼品)은 이제방일입증분(離諸放逸入證分)이라 이름하며, 가섭품(迦葉品)은 자광선교주지분(慈光善巧住持分)이라 이름하고, 교진여품(憍陳如品)은 현상분(顯相分)이라 이름한다.
어떻게 장수금강불괴신(長壽金剛不壞身)을 얻는 것인가?
가섭이 중생과 함께 똑같이 듣고자 하는 까닭에 물은 것이다. 대답은 “나는 3업(業)을 닦는 까닭에 장수를 얻는다”고 하였다.
무엇이 금강불괴신인가?
일체중생이 모두 파괴되어 없어지는데, 어찌 무너지지 않음[不壞]을 얻는가를 묻는다면, 앞서 행하는 바와 같이 해서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무엇이 견고한 힘인가?
마음에 분별이 없는 까닭에 견고함을 얻는다.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는 까닭에 장수(長壽)이다. 가히 설할 수 없는 까닭에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고, 유동(流動)이 없는 까닭에 견고함이다.
어떻게 장수를 얻는 것인가?
금강불괴신인 까닭에 장수를 얻는다.
어떻게 무너지지 않는가?
견고한 힘을 얻는 까닭에 무너지지 않는다.
가섭은 중생을 위해 하나도 남김없이 묻고 완전히 답하였다. 법상(法相)이 다함이 없는 까닭에 묻는다.
원컨대 부처님이시여, 미묘한 비밀[微密]을 열어서 널리 중생을 위해 설하소서.
무엇이 미묘한 비밀인가?
몸 밖에 부처가 있는 것 또한 비밀[密]이 아니며, 몸 안에 부처가 있는 것도 또한 비밀이 아니다.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것 또한 비밀이 아니다. 중생이 부처인 까닭에 미묘한 비밀이다.
어째서 중생이 곧 부처라 하는가?
중생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비유(非有)도 아니며, 비무(非無)도 아니다. 이러한 까닭에 중생은 부처이다.
어떻게 광대(廣大)를 얻음이 중생을 위해 의지(依止)가 되는 것인가? 어떠한 까닭에 광대라 이름하는 것인가?
식별의 상(相)이 있지 않고, 부처가 아님이 없고, 행이 청정하지 않음이 없고, 덕이 원만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중생을 위해 의지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 석가를 보고서 의지한다는 것은 의지라 이름하지는 않는다. 소승이 이해하는 뜻에서는 자비로운 까닭에 중생으로 하여금 의지하게 한다.
실제로 아라한은 아니지만 나한 등과 같은 사람이란 옛날에는 왕궁에서 태어나 아라한이 된다고 교시하였지만, 지금은 왕궁에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쌍림(雙林)에서 멸한 것도 아닌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나한이 아니면서 나한 등과 같다고 하는가?
가섭이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우치지 못하여 네 가지 의지(依止)를 묻지 않고, “여래가 만약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고 쌍림에서 멸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계를 얻어 네 가지 과보를 말미암지 않아서 실로 아라한이 아닌데, 어찌 여래ㆍ나한 등과 같은가?”를 물었는데, 이를 풀이하기를 “만약 여래가 실로 아라한이라면 네 가지 의지는 나한과 더불어 같을 수 있지만, 부처가 실로 나한이 아니라면 어찌 나한과 더불어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석가의 몸에는 두 가지 이름이 있는데, 하나는 응래(應來)이며, 또 하나는 보살실행(菩薩實行)이다. 응(應)이라 하는 것은 연화장세계로부터 대장엄불이 된 것으로서 태자로 왕궁에서 태어나 쌍림에서 멸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보살의 유희법(遊戲法)이다. 둘째로 진(眞)이란 오는 곳이 없는 것이다.
무엇이 나한과 같은 것인가?
부처에는 두 가지의 이름이 있으니, 하나의 진불(眞佛)이 화현하여 성문의 아라한과 동일하지만 부처는 실제로 성문이 아니니, 어찌 넷의 성문과 같겠는가? 풀이하면, 이전에는 실로 아라한이 있어서 나와 나한을 같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예전에 일찍이 나한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한은 나의 몸이 스스로 지은 것인데 어찌 같겠는가? 또 풀이하면, 석가의 몸을 아라한이라 이름하는데, 성지(性地) 보살을 어찌 나한과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 실행(實行) 보살이 마땅히 와서 또한 능히 부처로 화현한 것이니, 석가는 실로 아라한이었다면 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 석가가 일찍이 나한이 아니었다면 어찌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바로 성지 보살은 아라한이고, 아라한은 보살이지 실제로 부처는 아니다.
나한이 어찌 부처와 같겠는가? 석가가 실로 아라한이었다면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석가가 나한이었던 적이 없는데, 어떻게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바로 실행 보살은 아라한이고, 이러한 까닭에 왕궁에서 태어나 쌍림에서 멸한 것이니 모두 유희로서 보살이 나타내 지은 것이다. 전에는 실로 아라한이 없었고 나의 화현을 말미암아 중생이 아라한을 얻으니, 이러한 까닭에 내가 아라한을 지은 것이다.
둘째로 연화장세계의 보살이 화현한 것은 나와 다름이 없다. 이러한 까닭에 실제로는 아라한이 아니고 나한과 같은 것이다. 만약 내가 실제로 나한이라면 보살은 나와 같을 수 있다. 나를 나한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보살의 법상(法相)이 화현해 통한 것이 아니라서 모두 진실한 이해가 아니다.
네 가지 의(依)란 환희지(歡喜地)가 초의(初依)이며, 6지(地)가 제2의이며, 8지가 제3의이며, 법운지(法雲地)가 제4의이다. 성문을 화현함은 성문의 허망한 단면(斷面)이라서 아라한이었던 적이 없으니, 어찌 같다고 하겠는가? 보살은 이름하여 법불(法佛)이라고도 하며 연불(緣佛)이라고도 한다.
무엇이 법불인가?
법으로부터 생겨나 법을 행하고 견(見)을 얻는 까닭에 이름하여 법불이라 한다. 무엇이 연불인가? 연이 있는 까닭에 보는 것을 연불이라 이름한다.
【문】 가섭의 뜻이 만약 스스로의 이해가 이와 같은 물음을 필요치 않고,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면, 어찌 이와 같이 묻겠는가?
【답】 가섭은 이 열두 동자와 여래의 위신력으로 가르침을 더하는 까닭에 능히 물을 수 있는 것이며, 가섭이 묻는 바는 바로 열반과 다름이 없다.
천마(天魔)가 중생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이것을 풀이하면, 가섭은 바로 여래의 몸을 묻는 것이지 미래를 묻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중생의 몸은 어찌하여 외마(外魔)가 와서 어렵게 만드는지를 스스로 믿지 못한다. 여래는 지금 보리수 아래에서 비로소 성불하여 정법을 장차 진흥시키려고 하는데, 마군은 그 무리들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에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무엇이 모든 조어(調御)의 마음으로 진제(眞諦)를 기뻐하며 설하는 것인가? 무엇을 이름하여 조어라 하는가?
범부 중생은 아는 바가 없어서 대승을 들으면 이것은 대승, 소승을 들으면 이것은 소승, 고(苦)를 들으면 이것은 고, 낙(樂)을 들으면 이것은 낙이라 한다.
어떻게 조어라 이름하는가? 고가 아닌데 고를 설하며, 낙이 아닌데 낙을 설하며, 상(常)이 아닌데 상을 설하며, 지난날 소(小)를 설하고 지금은 대(大)를 설하면, 또한 마음으로 진제를 기뻐하며 설하는 것이라 이름하지 않고 조어라고 이름하지도 않는다. 지금 무상(無常)을 무상이 아니라고 설하며, 고락을 고락이 아니라고 설하며,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다고 설하는 것, 이것을 설하여 진제라 한다.
정선(正善)을 구족하게 성취하며, 네 가지 전도(顚倒)를 연설한다. 정선을 구족하게 성취한다고 하는 것은 보살이 4무량심ㆍ10바라밀을 행하여 평등하지 않음이 없는 것으로서 이것을 상중정선(相中正善)이라 이름한다. 보살의 행은 정선이 아님이 없다. 성문은 나와 남이 있는 까닭에 정선이라 이름하지 않고, 보살은 나와 남이 없는 까닭에 정선이라 이름한다. 둘째로 정선이란 예전의 가르침은 옳지 못해서 성문은 구족하게 성취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열반의 이치가 올바른지라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으며, 생기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으므로 이름하여 정선을 구족하게 성취한다고 한다.
셋째로 환희지로부터 위로 법운지(法雲地)에 이르기까지를 이름하여 구족하게 성취한다고 한다. 네 가지 전도를 연설한다고 하는 것에서 성문인이 말하는 아(我)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고 부처는 고공무상(苦空無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전도이다. 성문은 고공무상이고 부처는 상락아정이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전도이다. 부처는 상락아정이고 중생은 고공무상이라고 하는 것도 전도이다.
여래가 성문을 위해 설한 네 가지 전도란 무엇인가?
네 가지 전도가 부전도(不顚倒)임을 올바로 설해서 다시 외법(外法)은 전도ㆍ부전도가 없음을 설한 것이니, 이것을 마음으로 진제를 기뻐하며 설하는 것이라 이름한다.
경에서 설하기를 “법은 유도 아니며, 무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진제라 이름한다”고 한다.
무엇이 여러 보살이 능히 보기 어려운 성(性)을 보는 것인가?
가섭에게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불성이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며, 둘째는 불성을 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지견(知見)을 사용하지 않고 여래의 깊은 불성을 이해하게 할 수 있는가?
어떠한 까닭에 깊다고 하는가? 불성은 가히 짓거나 만들어지거나 닦거나 얻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으로 깊다고 한다. 성문은 협소하여 궁극적이지 못하며 능히 보지 못하지만, 보살은 자비를 행해 널리 구제하지 견[見]을 구하지 않는다. 중생을 위하고 속박을 받는 까닭에 보기 어렵다[難見]라고 한다. 두 번째의 풀이는 불성은 가히 견법(見法)이 아니니, 능견(能見)ㆍ소견(所見)ㆍ능지(能知)ㆍ소지(所知)ㆍ능수(能修)ㆍ소수(所修)가 아닌 까닭에 능히 보기 어려운 성(性)을 본다고 이름한다.
무엇이 만자(滿字)와 반자(半字)의 뜻을 이해하는 것인가?
반자란 점교(漸敎)이며, 만자는 열반이다. 만족교(滿足敎)인 까닭에 만자라 하며, 부처님 가르침의 과보와 공덕을 모두 포섭하는 까닭에 만자라 한다. 성문ㆍ연각의 가르침은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반자라 한다. 열반은 돈(頓)이라고도 하고 점(漸)이라고도 한다. 지금 열반의 2제상대(諦相對) 가운데 만(滿)을 논하는데, 그 행에 대하여 만과 불만(不滿)이 있는 까닭에 점교라 하지 이(理)에 대해서는 만과 불만이 없다. 이러한 까닭에 열반을 점교라 하고, 반자의 형태로 열반을 돈교(頓敎)라 한다. 둘째로 또 만반(滿半)이라고 말하는 것은 중생의 망상이다. 이(理)는 만ㆍ불만이 아니니, 이 때문에 열반을 점교라 한다. 어찌하여 모든 보살은 능히 어려움을 보고 성품을 보는 것인가? 이것은 단지 법을 보는 것이다. 또 무엇이 만자와 반자의 뜻을 이해하는 것인가 하면, 이제 다시 견(見)ㆍ불견(不見)이 없는 것이다.
무엇이 공성행(共聖行)으로 사라사조(娑羅娑鳥)와 같은 것인가?
여래가 왕궁에서 부인과 아들을 둔 것이나, 혹은 출가하여 성문과 함께 한 것은 비유하면 사라사조가 함께 무리를 이루어 서로 분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성자 여래는 일체중생과 함께 닦고 함께 행하는 까닭에 “무엇이 공성행으로 사라사조와 같은 것인가?”라고 말한 것이다. 둘째로 풀이하면, 색(色)은 성인이 되며, 성문의 색심(色心)은 성인이 되며, 보살성인(菩薩聖人)은 심색(心色)이 아니다. 심색이 있다고 말하는 까닭에 성인이 아닌 것이다. 성문성인은 형색(形色)을 함께 하며, 보살성인은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의 심식(心識)이 없다. 이(理)는 심식을 공유하는데, 범부는 심식이 없는 성인인 까닭에 성인이라 한다.
사라사조라는 것은 총체적인 명칭이다. 비유하면 여래가 일체중생과 함께 해도 분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가린제(迦隣提)란 열반이 일체중생과 다름을 비유한 것으로 도리어 성문을 떠난다는 의미이다.
보살은 여래와 일체중생이 무차별인 것을 아는 까닭에 공(共)이라 한다.
서로 버리고 여읜 것이 있음을 풀이하면, 여래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범(凡)과 성(聖)이 있어서 서로 버리고 여읜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면 일체중생을 서로 버리고 여읨이 없다고 하는 것이 성문의 뜻이다. 보살은 서로 버리고 여읨이 없다는 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지 않아도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않고 세상에 나오더라도 서로 여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제(世諦)에는 고공무상(苦空無常)이 없으며, 제일의제(第一義諦)에는 상락아정이 없는 것을 풀이한다. 어떤 사람이 세제에 상락아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천박하게 뜻을 이해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이 세제는 있고, 이 제일의제는 없으며, 세제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제일의제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한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아서 다시 외부의 법이 없는 까닭에 공성행이라 이름한다.
가린제ㆍ일월ㆍ태백(太白)과 세성(歲星) 중에서 무엇을 일월이라 하는가?
이 일월이란 범부는 일월이 출몰하는 것을 보지만, 성인은 일찍이 출몰을 본 적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둘째로 성문인은 부처가 왕궁에서 태어나 쌍림에서 멸한 것을 보지만, 보살은 일찍이 왕궁에서 태어나거나 쌍림에서 열반에 든 것을 보지 않는다. 셋째로 일월이 사라지기 때문에 태백과 세성이 나와서 세상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여래가 열반에 들면 성문ㆍ연각이 나온다. 법과 여래가 다른 까닭에 별이 나온다고 말하는데, 중생은 망상으로 일월과 세성에 출몰이 있다고 보지만 실은 출몰이 없다. 중생은 여래가 생멸이 있다고 보지만 실은 여래에게는 생멸이 없다.
무엇을 아직 발심하지 않았는데도 보살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성문에게는 발(發)과 불발(不發)이 있으며, 연각에게도 발ㆍ불발이 있으며, 보살에게도 발ㆍ불발이 있다.
이 세 종류의 보살을 발심이라 한다. 어떻게 발심이란 것은 과가 다른데 발심이라 할 수 있겠는가? 여래는 처음부터 중생에 발ㆍ불발이 있다고 가르친다. 옛 가르침에는 발(發)이 있다 하더라도 발이라 이름하지 않았다.
무엇을 발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 얻을 수 있고 구할 수 있는 차별이 부처와 다르다고 보는 것을 발이라 하지 않는다.
무엇을 발이라 하는가? 지금 무상열반(無相涅槃)의 이치가 훈습하는 것을 설하는 까닭에 일체로 하여금 발하게 하는 것을 이름하여 발이라 하는데, 성문ㆍ연각에게는 있지 않다. 보살에게는 발ㆍ불발이 있는 까닭에 아직 마음을 발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보살이라 이름한다. 열반이 평등하게 일체를 비추는 까닭에 일체가 발심하지 않음을 모두 보살이라 이름한다.
가섭은 무슨 까닭에 “어찌하여 아직 발심하지 않았는데 보살이라 이름하는가?”라고 물었는가?
발심자는 일월을 보지만 발심하지 않은 자는 일월을 보지 못한다. 둘째로 발심자는 상주(常住)를 보지만 발심하지 않은 자는 보지 못한다. 예전에 여래가 세상에 나왔을 때 발ㆍ불발이 있었는데, 발이란 견(見)이고 불발이란 불견(不見)이었다. 지금 열반이 평등하게 비추면, 발은 발이기도 하고 또한 불발이기도 하다.
어떻게 대중에게서 무소외(無所畏)를 얻는 것인가?
보살이 세상에 출현해서 자비와 평등으로 중생상(衆生相)을 파괴하지 않는 까닭에 무소외라 한다.
보살은 두려움이 없고 중생 또한 두려움이 없다. 왜 중생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가?
보살은 세상에 출현해서 중생상을 파괴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중생 역시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래가 세상에 출현해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4무량심으로써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며, 따라서 천마(天魔)ㆍ외도(外道) 나아가 일천제(一闡提)도 없다. 마치 한 자식을 생각해 두려움이 없는 것과 같다.
어떠한 까닭에 중생에게 두려움이 없는 것인가?
일체중생이 여래를 마치 부모와 같이 보는 까닭에 두려워하는 바가 없다.
어떠한 까닭에 천제(闡提)라 이름하는가?
부처도 알지 못하고 내외도(內外道)를 알지 못하므로 일천제라고 이름한다.
“일천제는 내외를 알지 못하지만, 보살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묻는데, 이를 풀이하여 말하면, “보살은 내외를 알지 못하더라도 죽이지 않지만 일천제는 알지 못하는 까닭에 죽인다. 마치 염부금(閻浮金)이 능히 그 과실을 설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니. 이는 대중과 조화한다[和衆]는 뜻으로 해석한다.
염부단금(閻浮檀金)에는 네 종류가 있다. 네 종류는 무엇인가?
첫째는 청(靑)이며, 둘째는 황(黃), 셋째는 적(赤), 넷째는 자마(紫磨)이다. 청은 외도를 비유한 것이고, 황은 성문ㆍ연각을 비유한 것이며, 적은 6바라밀 보살을 비유한 것이며, 자마는 여래를 비유한 것이다. 염부금에는 또한 청ㆍ황ㆍ적ㆍ백이 있으며, 네 종류의 갖가지 색이 있다. 둘째로 세간의 좋은 물건[好物]이 비록 또 단정하더라도 나쁜 점이 있다. 염부금은 이와 같은 물건이 아니므로 그 허물을 설할 수 없다. 여래가 열반을 얻고 갖가지 성문ㆍ외도ㆍ6바라밀의 보살을 비유한 것이니, 마치 염부금이 그 허물을 설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자마금(紫磨金)의 갖가지 색을 갖춘 것은 열반을 갖춘 천마ㆍ외도ㆍ성문ㆍ연각ㆍ6바라밀 보살을 비유한 것이다. 어떠한 까닭에 이와 같은가?
이것 외에 달리 다른 법이 없기 때문이다. 자마금은 일체를 구족하여 모든 색으로 말할 수 없으니, 성문ㆍ연각ㆍ6바라밀ㆍ외도 등 갖가지가 있는 까닭에 말할 수 없다. 열반의 이치는 청ㆍ황ㆍ적ㆍ백의 법이 아니더라도 또한 청ㆍ황ㆍ적ㆍ백인 까닭에 말로 할 수 없으니, 가령 청ㆍ황ㆍ적ㆍ백이 있어서 그 과실을 설하더라도 이 청ㆍ황ㆍ적ㆍ백은 일찍이 있은 적이 없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
어떻게 탁세(濁世)에 처해서 연꽃처럼 오염되지 않겠는가?
탁세란 5탁(濁)이다.
무엇이 5탁인가?
겁탁(劫濁)과 번뇌탁(煩惱濁) 등이다. 석가는 5탁에 출현해서 왕궁에서 태어났고 처자가 있는 것이다. 금은 등 일곱 가지 보물의 갖가지 재물을 모두 이름하여 탁이라 하는데, 그에 오염되는 바가 없는 까닭에 이름하여 탁세에 처해 오염되지 않는 것이 연꽃과 같다고 한다. 둘째로 3승의 법을 이름하여 탁이라 한다. 지금 열반은 3승에 오염되는 바가 아닌 까닭에 오염되지 않는다고 한다.
무엇이 번뇌에 처해 번뇌에 능히 물들지 않는 것이, 의원이 중생의 병을 치유하더라도 병에 오염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인가?
가섭이 물은 뜻은 여래에 의거한다. 삼계의 번뇌와 98사(使)도 여래가 세상에 나왔을 때 그를 오염시키지 못하지만, 일체중생은 삼계의 번뇌와 98사에 오염된다. 둘째로 성문ㆍ연각ㆍ6바라밀은 번뇌를 끊어야만 하고 불과(佛果)를 얻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번뇌에 오염된다. 셋째로 10지 보살은 행으로 대지(大智)에 통달하는 까닭에 번뇌에 오염되지 않는다.
넷째로 대보살은 과를 바라는 까닭에 또한 번뇌에 오염된다. 지금 열반은 인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에 오염되지 않는다. 다섯째로 4제(諦)의 가르침에서 나아가 반야바라밀과 법화 또한 번뇌에 오염된다. 지금 열반의 이치는 유동(流動)이 없고 득실(得失)이 없으며 기멸(起滅)이 없는 까닭에 오염되지 않는다. 마치 의원이 중생의 병을 치료하더라도 병에 오염되지 않는 것과 같다.
여래는 세상에 나와 처음에 3귀(歸)ㆍ5계(戒)로부터 보살계에 이르기까지 탄지저두(彈指低頭)의 점교(漸敎)로써 중생의 병을 교화ㆍ치료하면서 번뇌를 아는 까닭에 병에 오염되지 않는다. 중생은 번뇌를 모르는 까닭에 항상 병에 오염된다. 두 번째의 차제교(次第敎)도 중생의 병을 고친다고 이름한다. 세 번째는 역교(力敎)라 이름하는데, 신통변화의 몸으로 일체를 항복시키는 까닭에 또한 중생의 병을 치료한다고 이름한다. 네 번째로 지금 설하는 열반은 앞의 별교(別敎)의 걱정[患]을 치료하는 까닭에 중생의 병을 치료한다고 한다.
무엇을 걱정이라 하는가?
일체중생이 아직 발심하지 않은 것을 걱정이라 한다. 다시 풀이하기를, 장육(丈六)이 발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열반이 평등하게 비추어 발심시키는 까닭에 중생의 병을 치료한다고 이름한다.
생사의 대해 가운데 어떻게 선사(船師)가 되는가?
삼계를 생사라 이름하며, 여래가 세상에 나오는 것도 생사라 한다.
어떠한 까닭에 생사라 이름하는 것인가?
여래의 법은 능히 중생을 제도하여 태어나거나 죽지 않게 하는 까닭에 생사의 대해에 선장이 된다고 한다. 둘째로 장육이 차제법(次第法)과 나아가 법화(法華)까지 설하는 것도 생사라 이름한다. 법이 지금 열반을 설하여서 옴도 없고 감도 없고 생함도 멸함도 없이 예전 생사의 가르침을 제도하는 까닭에 선장이라고 한다. 처음에 장육은 불생사이고 가르침은 불생멸이라고 풀이하였다. 둘째로 장육 및 가르침도 생사이지만, 열반에는 생멸이 없다.
셋째로 부처님 멸도 후 누가 능히 생사를 넘는가? 오직 대보살만이 능히 생사를 넘는다. 넷째로 보살 또한 능히 넘지 못하고, 대열반의 이치만이 능히 생사를 넘을 수 있다. 비유하면 세간의 선장은 방편을 잘 이해하여 능히 바다의 어려움을 아는 것과 같다. 번뇌는 대해이고 삼계는 배가 되며, 여래가 갖가지 방편으로 설한 3승의 법이 선장이 된다. 세간의 선장은 인(因)을 지시하고 과(果)를 지시해 중생을 배에 오르게 하며, 여래는 방편으로 3승법을 설해 인을 설하고 과를 설한다. 말이 삼계를 벗어난 자도 여전히 생사이니, 이러한 까닭에 삼계로서 배를 삼는 것이다. 최초의 차제교는 생사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까닭에 선사가 되고, 법화(法華)는 만행(萬行)으로써 선장이 된다.
지금 열반은 생사가 없는 것으로 배를 삼는다. 무엇으로써 병에 오염되는 것을 보이는가? 또 생사의 대해에서 어떻게 선장이 되는가?
앞서 번뇌를 떠나고 또 번뇌의 대해 가운데 배가 되어서 피안에 도달하게끔 한다.
생사를 버리는 것이란 무엇인가? 뱀이 허물을 벗는 것과 같은 것인가?
가섭이 묻기를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여 태어나고 죽다가 지금 열반도에 들어가면서 ‘나는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이 마치 뱀이 허물을 벗는 것과 같아서 생멸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라고 했다.
차제(次第)로 장육이 설한 것은 생사법이고 지금은 열반의 불멸을 설한다. 앞의 차제의 가르침에서 이 가르침은 이치가 없는 것이 마치 뱀이 옛 껍질을 벗는 것과 같아서 이득도 없고 공덕도 없으며, 지금의 열반은 생도 없고 멸도 없으며 또한 가르침을 파괴하지도 않는다. 둘째로 일체중생에서 나아가 언설ㆍ불언설에 이르기까지 형체가 있는 종류는 모두 공(空)이라 이름하고, 오직 열반만이 진실의 도리이다.
“3보(寶)를 관하는 것이 오히려 천의수(天意樹)와 같다”고 함은 무엇인가?
삼보는 궤칙(軌則)이라고 하는데, 여래가 출세하여 3보가 있음을 나타내 보인다. 3보가 있는 까닭에 3귀를 받고 5계를 얻으며, 또한 손가락을 튀길[彈指] 동안의 시간을 얻기도 하고, 뜻에 따라 수행하는 바와 뜻에 따라 얻는 바를 얻기도 한다.
여래는 또한 여의삼보(如意三寶)라 이름하며, 또한 여래여의(如來如意)ㆍ중생여의(衆生如意)라 이름한다. 무엇이 중생여의인가?
뜻에 따라 3귀ㆍ5계를 받고 나아가 보살이 남김없이 과보를 얻는 까닭에 중생여의라 이름한다. 여래여의란 중생을 근기에 따라 느끼는 까닭에 여의라 이름한다. 지금 열반여의라 말하는 것은 일체의 고통과 즐거움, 선과 악이 이치가 아님이 없는 까닭에 여의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3보를 관하는 것이 오히려 천의수와 같다는 것은 비유컨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있는 한 나무가 능히 여러 천(天)의 뜻에 따라 얻는 바가 있는 까닭에 여의수라 한 것과 같다. 여러 천이 이미 오랫동안 행을 닦았으므로 이 나무도 감득(感得)한다. 3보도 이와 같으니, 중생이 오랫동안 행을 닦은 까닭에, 또 장육도 감득하는 까닭에 3보가 오히려 천의수와 같다고 이름한다.
3승이 만약 성(性)이 없다면 어떻게 3승이라 설할 수 있겠는가?
여래는 하나의 법을 설하는 것이 아니다. 3승이란 중생의 근기인 까닭에 일음(一音)의 설을 부류에 따라 이해한다고 설한다. 여래가 3승을 설하더라도 설이라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중생의 근기에 따르는 까닭에 소승도 있고 대승도 있으니, 여래가 3승을 설하더라도 여래의 본뜻은 아니다.
무엇이 여래의 본뜻인가?
열반이 그것이다. 가섭이 물은 뜻은 ‘3승이 만약 성품이 없다면 어떻게 설할 수 있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여래가 답한 뜻은 일체제불은 중생을 위해 3승을 설한 것은 아니니, 지금 열반의 실상은 소승이면서 소승이 아니며, 대승이면서 대승이 아니라고 한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3승교는 1상(相)이라서 대승과 소승이 있지 않다. 셋째로 열반의 이치를 설하는 곳에는 대승을 말하지도 않고 소승을 말하지도 않으니, 중생의 지(智)에 차별이 있는 까닭에 가르침에 차별이 있다. 이치에는 대승과 소승의 차별이 없는 까닭에 대승과 소승이라 설할 수 있는 것이다. 향함과 차별함이란 실제로는 차별이 없으며, 나아가 외적인 차이도 없다.
오히려 낙(樂)이 아직 생기지 않은 것과 같은데, 어떻게 낙을 받았다고 이름하는가?
가섭이 물어 말하기를 “중생이 낙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낙을 받는 것을 설하는가?”라고 하였다. 범부는 고(苦)가 있고 낙이 없으며, 보살은 낙이 있고 고가 없다.
어떻게 낙이 있는가?
보살은 지(智)에 통달하여 과(果)에 이르는 까닭에 낙을 알지만, 중생은 모르는 까닭에 고가 있다. 보살은 과를 알아서 보살의 낙은 낙이 아니라고 말하거나 중생의 고는 고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는 모두 허망하기 때문이다.
열반은 고도 없고 낙도 없는 까닭에 이름하여 대락(大樂)이라 하는데, 낙이 아직 생기지 않았는데 어떻게 낙을 받는다고 할 수 있는가?
여래가 사라림(娑羅林)에서 법을 설하여 묻기를, “어찌하여 불순계(不純戒)ㆍ지득복계(持得福戒)ㆍ부득복계(不得福戒)ㆍ외도(外道)는 불계(佛戒)가 아닌가?”라고 했을 때,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앞의 것은 잡교(雜敎)이며, 이것은 열반이다. 게다가 외도의 열반이란 없다”라고 하셨다.
어찌하여 여러 보살이 중생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첫 번째 해석으로는 성문ㆍ연각ㆍ6바라밀 보살 내지 외도는 나와 남이 있고 증득이 있는 까닭에 이름하여 중생을 파괴한다고 한다. 둘째로 보살은 비밀히 행하고 비밀히 가르쳐서 중생의 근성을 알아 중생의 상(相)을 파괴하지 않는 까닭에 파괴라 이름한다. 보살이 파괴하지 않는 바라고 하는 것은 능히 파괴하는 것이다. 능히 파괴하지 않는 것은 보살이 아니니, 능히 이와 같은 법을 지어서 법상(法相)을 거스르지 않는 까닭에 중생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한다.
셋째로 보살은 열반에 청ㆍ황ㆍ적ㆍ백이 없고 나와 남이 없음을 아는 까닭에 이름하여 중생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한다. 넷째로 파괴하지 않는다는 것은 열반의 이치가 얻는 것도 아니고 증득하는 것도 아니고 만드는 것도 아니고 짓는 것도 아닌 까닭에 중생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다섯째로 진리는 중생을 파괴하지 않고, 중생 역시 이치를 파괴하지 않는다.
어째서 이와 같은 것인가?
중생은 이치[理]이고 이치 외에 다시 중생이 없는 까닭에 중생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하여 타고난 맹인을 위해 눈이 되어 인도하는 것인가?
가섭은 “어찌하여 눈이 되어 인도하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첫 번째 해석은 앞서 가르친 성문ㆍ연각ㆍ6바라밀이 그 상(相)에 따라 이해하는 것을 눈멀었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가 성문ㆍ연각ㆍ6바라밀을 이해하는데, 만약 일찍이 얻은 바가 있다면 이것은 눈을 떴다고 할 수 없지만 이 법이 일찍이 있었기 때문에 눈을 뜬 것이다. 비유하면 눈먼 사람이 청ㆍ황ㆍ적ㆍ백을 알지 못해서 어떤 사람이 청ㆍ황ㆍ적ㆍ백을 말하면 도리어 미망에 빠지지만, 만약 청ㆍ황ㆍ적ㆍ백이 없다고 말하면 이해하는 것과 같으니, 이를 이름하여 눈을 뜬 비유라고 한다. 3승의 사람에게는 분명히 인과 과가 있는 차별이 있고 얻음과 얻지 못함이 있다. 지금 말하는 열반에 만약 장(長)이 있고, 단(短)이 있고, 득이 있고, 부득이 있다면 미망에 헤매는 것이지만, 열반은 청ㆍ황ㆍ적ㆍ백이 없고, 득도 없고 증(證)도 없으며, 장도 없고, 단도 없는 까닭에 이름하여 눈이 열림[開]이라 한다.
장육의 수도(修道)ㆍ지계(持戒)ㆍ보시(布施)를 인하는 것은 인이 아니다. 불성의 얻음도 없고 닦음[修]도 없음을 인하는 것을 이름하여 인이라 한다. 일체 중생은 3승의 사람을 봄으로써 법으로 삼지만, 3승의 사람은 청맹(靑盲)이라 이름한다. 단지 3승의 사람뿐만 아니라 일체중생도 또한 청맹이다. 법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며, 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열 수 없는 것도 아니며,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가르침 때문에 청맹이라고 설하지만, 이치로는 청맹ㆍ무청맹을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청맹ㆍ불청맹을 말하더라도 법상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이 두 가지로 있은 적도 없고[不曾有] 없은 적도 없음[不曾無]을 말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있음과 있지 않음[有不有]ㆍ없음과 없지 않음[無不無]ㆍ열림과 열리지 않음[開不開]을 설하는 것인가? 모두 거스르지 않는 까닭에 열림이라고 한다.
무엇이 많은 방면[多頭]을 보이는 것이며, 오직 대선(大仙)이 설함을 원하는 것이라 하는가?
가섭이 물은 뜻은, “여래는 처음에 갖가지 많은 방면[多頭]을 가르쳤지만, 지금 열반은 무슨 까닭에 오직 하나이며 둘이 아니라고 설하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여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의 많은 방면이 아니다. 중생이 옛날 많은 근(根)을 행했으니, 이러한 까닭에 많은 방면을 설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래서 많은 방면을 보였다고 말한 것이다. 둘째로 법의 많음[多]이다. 무엇을 많음이라 하는가? 법상이 이와 같이 많은 방면을 보이는 것이다. 셋째로 연유하는 설이 많은 것이다. 이 법이 만약 있다면 다설(多說)이라 이름하지만, 이 법은 일찍이 없었던 까닭에 다설이라 하지 않는다. 넷째로 열반의 이(理)와 상(相)은 이와 같이 많음도 많지 않음도 아니다. 다섯째로 참된 이치의 본말(本末)은 유무의 법이 아니니, 이러한 까닭에 설하든 설하지 않든 방해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