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般若)란 무엇인가

2024-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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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般若)란 무엇인가



반야는 불교의 근본 교리 중의 하나로 지혜를 뜻합니다.

범어로는 프라즈나(prajna)이며, 인간이 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를 말합니다. 보통 말하는 판단 능력인 분별지(分別智, vijnana)와 구별 짓기 위하여 반야라는 음역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며, 달리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반야의 사상은 대승불교에서 확립된 것입니다.


대승의 반야는 법(法, 진리)에 대한 새로운 자각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소승불교가 가졌던 법에 대한 객관적 해석과 이론적 분석 태도를 지양하고, 스스로의 체험과 실천을 통하여 주체적으로 법의 있는 그대로를 체득하는 자각(般若)이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법이란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선정(禪定)의 체험을 통하여 자각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이 반야의 자각을 통하여 인생의 근본 의혹이 해소되는 것이고, 인간과 만물의 진실을 꿰뚫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법의 주체적인 체험을 통하여 얻는 깨달음의 내용을 반야의 지혜로써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주객의 대립을 초월한 경지에서 감득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의식이기 때문에, 이성과 지성의 세계에서 작용하는 지식과는 명확히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야의 지혜는 선정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므로, 반야의 입장에서는 이 선정의 체험이 재평가되고 나아가 선종(禪宗)의 조사선(祖師禪)까지도 이 반야에 근거를 두게 된 것입니다.


이 반야의 지혜는 반야부 계통의 모든 경전에서 여러 가지로 해설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찬술한 반야부 계통의 주석서에서도 반야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불교의 목적은 반야의 완성으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반야의 지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공(空)으로서 파악되었고, 반야를 얻기 위해서는 집착해서는 안 될 것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타파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공사상이 크게 부각된 것입니다. 그래서 공의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자는 자연히 반야의 지혜를 체득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일관됩니다.


또, 주객이 분리된 입장에서가 아니라, 분별을 초월한 경지에서 감득(感得)되는 반야의 지혜는 현실 사회 속에서 자비(慈悲)로서 작용해야만 합니다. 교리적으로는 이것이 지혜와 자비의 상즉(相卽)이라는 형태로 해설되고 있는데, 불교적 체험을 얻은 사람이면 저절로 생겨나게 되는 보시(布施)의 정신이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반야의 지혜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다시 반야의 몸으로 현실 속에 되돌아와서 보시라는 형태의 갖가지 자비를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반야는 선정과 불도(佛道) 및 열반(涅槃)에 대한 여러 가지 집착을 소멸시키고 성불할 수 있게 하는 주문으로까지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 반야는 2반야·3반야·5종 반야 등으로 분류되는데, 공반야(共般若)와 불공반야(不共般若)로 구분되는 2반야는 지도론 (智度論)에서 주장한 것으로, 천태종에서 이 설을 많이 따르고 있습니다. 공반야는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의 삼승(三乘)을 위하여 설한 반야의 법문으로, 반야경 등의 여러 대승 경전이 이에 속합니다. 불공반야는 일승(一乘)의 보살만을 위하여 말한 것으로, 화엄경이 이에 속합니다.


화엄경은 부처의 지혜를 모두 표출한 경전이기 때문에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뜻에서 불공(不共)이라고 한 것입니다. 3반야는 문자반야(文字般若)·관조반야(觀照般若)·실상반야(實相般若)인데, 반야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채택될 뿐 아니라, 우리 나라 원효(元曉) 등의 고승들은 이에 대해 깊이 있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문자반야는 방편반야(方便般若)라고도 하는데 이는 부처님이 설하여 문자화된 경,율,논(經律論)을 전부 통칭한 것으로, 문자도 반야를 나타내는 방편이 될지언정 반야 자체가 될 수는 없지만, 문자로 말미암아 반야의 뜻을 전할 수 있으므로 문자반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관조반야는 경·율·논의 글자나 말에 의하여 진리를 알아내고 이 진리에 의해서 수행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관조반야의 진실한 지혜는 반드시 무념무분별(無念無分別)입니다.


실상반야는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진리이며, 관조반야를 통하여 체득되는 궁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태종에서는 이를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이치를 깨닫는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였고, 신라의 원효는 여래가 감추어진 중생이 곧 이것이라 하여, 실상반야가 곧 여래장(如來藏)이라는 놀랄 만한 사상을 전개시키고 있습니다.


중국 선종의 초조인 보리달마대사 역시 반야를 중시하였고, 대승의 반야공관(般若空觀)에 바탕을 둔 강한 실천력과 가르침으로 선을 중국에 뿌리내리게 하였습니다. 반야공관은 대승사상의 핵심이며 대승보살이 실천해야 할 덕목인 동시에 우리나라 선수행에서 도달해야 할 목표이기도 합니다.


당나라 때 현사사비(玄沙師備: 835~908) 스님께서도 “대개 반야를 배우는 보살은 큰 근기를 갖추고 큰 지혜가 있어야 한다 (夫學般若菩薩 具大根器 有大智慧始得)”고 하였으며,원각경‘변음보살장(辨音菩薩章)’에서도 “걸림 없는 청정한 지혜가 다 선정에서 나온다(無碍淸淨慧 皆依禪定生)”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지혜는 선정을 닦음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모든 보살과 선지식이 선정을 닦았듯이 선정 수행을 권장한 것입니다. 육조 대사께서는 지혜를 선정과 구별해서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정(定)과 혜(慧)는 하나요, 둘이 아니니, 정은 혜의 체(體)요, 혜는 정의 용(用)이라 하여 참 지혜는 선정의 정(定)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 대사께서도 영가집(永嘉集)에서 “일체 만법의 실상의 이치는 지혜가 아니면 알 수 없고, 지혜는 일체 만법의 이치를 바로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지혜가 만법의 이치를 바로 아는 것임을 극명히 하여 지혜를 성취하는 것이 수행자가 해야 할 최우선의 길임을 밝힌 것입니다. 또한 지혜는 계(戒)와 정(定)을 닦음으로써 자연히 우러나오는 것이며, 계율이 아니면 선정에 들 수 없고, 선정이 아니면 지혜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바른 이치를 깨닫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계행을 철저히 하고 선정을 닦아야 합니다.


반야는 대부분 여러 가지 비유로서 그 공능(功能)이 이해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어두운 방에 불을 밝히면 방안의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으로 가득 차 색깔과 형상이 있는 모든 것들이 드러나는 것처럼 반야는 무명(無明)의 어둠을 깨뜨리고 제법실상(諸法實相)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번뇌가 미세한 것이든, 큰 것이든, 어떤 것도 문제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좌선에 있어서, 이러한 반야의 특성은 번뇌와 그것으로 야기된 갖가지 업의 정화와 관련되어 매우 중요시 하고 있습니다.


반야의 종류는 크게 유분별지(有分別智)와 무분별지(無分別智)로 나뉩니다. 유분별지는 일체법은 무자성(無自性)이며 공성(空性)임을 알지만 대상에 대해 그것을 인식 차별하는 것이고, 무분별지는 일체 법이 무자성, 공성임을 안 후 대상이 끊어져 대상과 일체가 되어 저절로 법에 부합되는 것으로 근본지(根本智)라고도 하며, 모든 경전에서 말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지혜, 최상의 지혜, 두루 하지 않음이 없는 지혜, 상대가 끊어진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은 불보살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 반야로서 다시 중생 세간을 관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생의 근기를 자세히 파악하여 역경계나 순경계를 불문하고 하고자 하는 것에 동사섭(同事攝)하여 그 대비 방편으로 쉬지 않고 중생 제도를 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경쟁하고자 하는 마음이 끊어지고 신통 묘용을 초월하여 소리 없이 이 세상에 처하고, 상이 없이 중생을 교화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지혜는 함이 있는 유위법(有爲法)의 지혜가 아니요, 세간상의 지혜도 아닙니다. 벽을 뚫고 하늘을 나는 지혜가 아니라 탐진치(貪瞋痴)끊는 것이요, 철저하게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옛 선사들의 수행이 모두 그러했고 제자를 지도하신 것이 다 그러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반야란 존재의 참모습(실상)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 곧 지혜를 말하는 것인데 이때 깨달음 혹은 지혜라고 하는 것은 일상적인 우리의 인식을 통한 앎과는 다르기 때문에 바로 이 부분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세간적 분별적 인식 방식과는 다른 앎이기 때문에 그러한 앎이 없는 사람이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반야 지혜란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연기법(緣起法)에서는 존재의 참모습이란 연기임을 아는 것(보는 것)입니다.

둘째 심법(心法)에서는 존재의 참모습이란 존재의 근원인 진아(眞如)를 아는 것(보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보는 것이 곧 진여이기 때문에 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보는 것)입니다. 형상화한 존재는 환(幻:환상)과 같다는 것이 연기법의 가르침이라면, 그러한 환의 바탕이 진여(眞如)라고 하는 것이 심법(心法)입니다. 이 둘의 가르침이 말하는 바는, "존재하는 것은 실체가 없는 그림자와 같은 것임"을 일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야 지혜가 발현(發顯)되지 않으면, 수행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설령 마음이 편안하고 문제가 없다고 여겨지는 경지는 체득할 수는 있지만 이는 깨달음은 아닌 것입니다.


깨닫게 되면 딱히 마음을 어떻게 하지 않습니다. 고요하게 유지하려고 하지 않고, 바라보려는 관점을 유지하려고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안팎의 경계에 휘둘리지 않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물질 문명의 만능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밖에서 행복을 구하려고만 합니다. 재물을 쌓고 좋은 옷, 좋은 자동차 무엇이든 끊임없이 외부에서 끌어옵니다. 그러나 결코 행복해지지 못합니다. 그것은 행복은 결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외부에서 가져온 것들로 인해 우리는 커다란 고통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을 해야 하고,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끝없이 달려갑니다. 그러다 보면 행복을 위해 취한 그것들이 오히려 주인이 되고 나 자신은 그 물건들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버리고 놓아야 합니다. 버리고 놓으면 행복해집니다. 그것은 물질적 욕구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또 계속해서 비우고 덜다 보면 결국에는 내재돼 있는 진여 자성이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바로 부처님이 현현(顯現)하게 되는 것이지요.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놓아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행복은 저절로 내 안에 깃들게 됩니다.


깨달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외부에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내 안에 모두 내재돼 있습니다. 그러니 드러나게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근기(下根機)의 사람들은 밖에서 진리를 구하고 깨달음을 갈구합니다. 그런 이유로 반야 지혜가 본래 우리의 본성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깨달음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마음이 본래 반야 지혜임을 알게 되면 바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야 지혜는 근기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내재돼 있기 때문입니다.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집착하는 마음을 놓아 버리면 내재돼 있는 부처님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반야바리밀인 것입니다.

 

※ 살반야(薩般若, sarvaja):일체지(一切智) 의 뜻으로, 일부분만 아는 것이 아니라 안팎의 일체법의 모습을 요지(了知)하여 전체를 원만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을 말하며, 바로 불지(佛智)를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