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해설 강의

2024-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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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 5온이 다 공한 것을 비추어 보시고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났느니라.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수⦁상⦁행⦁식도 이와 같느니라.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고 눈⦁귀⦁코⦁혀⦁몸⦁뜻도 없고 빛⦁소리⦁냄새⦁맛⦁감촉⦁법도 없고 

눈의 세계도 없고 내지 의식의 세계도 없고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고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고 고⦁집⦁멸⦁도도 없고 지혜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마음에 장애를 없애느니라.

장애가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 멀리 뒤바뀐 생각을 여의고 마침내 열반을 이루었나니 

삼세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반야바라밀다는 크고 신비한 주문이고 크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고, 같음이 없는 주문으로서 

능히 일체 고통을 없애 주느니라.

진실하여 헛되지 아니하므로 반야바라밀다 주문을 설하나니 곧 주문은 다음과 같느니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1.반야심경이란?

 

<반야심경>과 <천수경>은 우리나라의 불교행사 때에 제일 많이 읽혀지는 경입니다.

천수경이 관세음보살의 원력과 위신력, 그리고 중생이 어떻게 관세음보살을 신앙하며 중생의 입장에서 어떠한 발원을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씀했다면, 반야심경은 <반야 중도 해탈>의 세계를 중심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불과 260자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경문이지만, 대, 소승 경전의 내용을 간결하고도 풍부하게 응축하고 있어서, 예불이나 각종의식에는 물론 식사 때에도 지송하고 있을 뿐 아니라 초 종파적으로 공통으로 독송하는 경전입니다. 불교에 입문하지 않더라도 불교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전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기 앞서 외워두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할 만큼 불교 입문서로서의 대표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부정(否定)을 통해서 진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소승불교(근본볼교)에서는 중생의 입장에서 부처님이 되기 위하여 부처님의 경지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명하느라,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 등이 있다고 긍정적인 관점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대표 경전인 반야심경에서는 반대로 이미 완벽하게 깨달으신 관세음보살(관자재보살)의 입장에서 바라보니, 중생이라 할 것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과 그 방법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까지 합쳐서 총 270자에 불과한 반야심경에는 ‘아니 불(不)’자가 9자, ‘없을 무(無)’자가 21자, ‘비어있을 공(空)’자가 7자나 나옵니다.

반야심경의 본문은 “무엇은 무엇이다.”라는 긍정 표현은 거의 없고, “무엇은 무엇이 아니고, 무엇은 물론, 무엇 무엇까지도 없다.”란 부정 표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2.반야심경의 구성

 

<반야심경>에는 일곱 가지 번역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제일 많이 독송 되는 경이 현장(玄藏) 역본(譯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주로 현장 역본을 독송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준말입니다. 더 줄여서 <심경(心經)>이라고도 합니다. 반야심경은 반야부 경전, 곧 무아인(無我印) 경전 6백 여 권 중의 골수(骨髓)가 금강경(金剛經)이고, 이 심경은 안목(眼目)이라 하는 것이며, 또는 8만 대장경 중의 요체(要諦)라 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반야계 경전뿐만 아니라 팔만대장경의 8만4천 법문을 260자 안에 요약한, 전무후무한 경전이라 할 것입니다. 그 만큼 군더더기 하나 없이 불교 사상의 정수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어서, 음미 할수록 한자 한자가 놀라운 짜임새로 구성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선 공사상의 핵심을 정교하게 변증하는 앞 단계가 있고 이어서 바라밀의 경지를 웅장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또 결론으로 진언이 엄숙한 울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 摩訶般若婆羅密多心經 ]

觀自在菩薩 行 深般若婆羅密多 時 照見 五蘊皆空 度 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不如是 舍利子 是 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 故 菩提薩埵 依 般若婆羅密多 故 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 般若婆羅密多 故得 阿耨多羅三邈三菩提 故知般若婆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般若派羅密多呪 卽說呪曰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裟婆訶



[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

관자재보살 행 심반야바라밀다 시 조견오온 개공 도 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 고 보리살타 의 반야바라밀다 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 반야바라밀다 고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 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婆羅密多心經)

 

반야심경은 대승불교 반야사상(般若思想)의 핵심을 담고 있는 경전으로 불교의식에서 가장 많이 독송되는 경으로 완전한 명칭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婆羅密多心經)’입니다.

그 뜻은 ‘지혜의 빛에 의해서 열반의 완성된 경지에 이르는 마음의 경전’이라는 것입니다. 이 경전이 크고 넓은 반야계(般若系) 여러 경전의 정수를 뽑아내어 응축한 것이기 때문에 ‘심(心)’은 심장(心臟)과 같이 경전의 심장 즉 핵심인 것입니다.

 

이 반야심경은 수백 년에 걸쳐서 편찬된 반야경전의 중심 사상을 260자로 함축시켜 서술한 것으로 불교의 모든 경전 중 가장 짧은 것에 속하지만, 불교의 모든 의식(儀式) 때 반드시 독송되고 있습니다.

이 반야심경에서 갈파한 반야바라밀다나, 공은 개개인의 참된 마음이고, 걸림 없는 마음, 공포가 없는 마음, 교만하지 않는 마음, 영원히 맑고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마음이며 부정을 겪어 그것을 넘어선 대(大) 긍정의 마음임을 자각할 것을 가르치는 위대한 지혜로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 할 것입니다.

 

마하(摩訶)

산스크리트어 마하(maha)의 음(音)역으로 생명 내부의 움직임 속에서 절로 솟아나는 지혜, 법의 이치를 깨달은 최상의 지혜를 뜻하는 말로 원초적인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반야(般若)

범어 프라쥬나(Prajna)로서 ‘지혜(智慧)’라 번역합니다.

‘지’는 지혜지(智)자로 알 지(知)자 밑에 날 일(日)자를 해서 아는 것이 해와 같이 밝다는 것이고,‘혜’는 지혜혜(慧)자로 총명, 밝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알고 알지 못한 것, 마치고 마치지 못한 것, 여의고 여의지 못한 것 등을 훤히 밝게 아는 것이고, 다 알았다는 그 생각까지도 끝까지 다 알아 그림자도 나타내지 않는 것입니다.

일반 빛(태양광선이나 등불)은 그림자가 있으므로 안은 비쳐도 밖은 비추지 못하여 완전하지 못하는데 반야는 안과 밖이 없으므로 밝고 밝아 보는 것마다 다 가리고 듣는 것마다 다 분별합니다. 그러므로 반야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것이므로 지식으로 분별하여 아는 것과 사뭇 다르기 때문에 명(明) 등의 말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반야라 한 것입니다..

 

바라밀다(婆羅密多)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aram + ita)의 음(音)역으로 완성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파람과 이타를 따로 떼어서 해석하면(param + ita)가 되고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르는 상태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을 택하더라도 본문의 뜻에 크게 위배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심(心)

범어 찌다(Citta) 산스크리트어 흐리다야(hrdaya)의 의역(意譯)으로 심장 또는 핵심이라는 뜻이 됩니다. ‘과거의 마음을 의(意)라 하고, 현재의 마음을 식(識)이라 하고, 미래의 마음을 심(心)이라’하여서 인체 생리의 근본 중심이 되는 우리의 심장은 이들 마음에 의하여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경(經)

산스크리트어 수트라(sutra)의 의(意)역으로 성전 또는 경전이라는 뜻이 됩니다.

경이란 부처님 말씀입니다. 경(經)은 길 (徑)이요 곧은(直) 부처님 말씀입니다.

곧고 바른 길, 세상 바르게 살아가는 올바른 이치에 대한 부처님 말씀이 경입니다. 말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진실한 말이건 거짓말이건 그것은 모두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곧 마음이요, 부처님 말씀은 부처님 마음입니다.

 

관자재보살 행 심반야바라밀다 시

觀自在菩薩 行 深般若婆羅密多 時

관자재보살께서 깊은 지혜로 깨달음에 이르는 실천을 행하실 때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산스크리트어 아발로키데 스바라

(Avalokite Svara)를 현장스님이 의(意)역한 것으로써 구마라집 스님이 번역할 때는 관세음보살이라고 번역하였고, 현장스님은 관자재보살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관세음보살은 볼 관(觀), 세상 세(世), 소리 음(音) 자로 번역하여 세상의 소리를 관찰하는 보살이라는 뜻으로 자비로움을 나타낼 때 그렇게 표현하고, 관자재보살은 볼 관(觀), 스스로 자(自), 있을 재(在) 자로 번역하여 이 세상의 고통을 자유롭게 관찰하는 보살이라는 뜻으로 보살의 지혜로움을 나타낼 때 그렇게 표현합니다.

 

관자재(觀自在)

산스크리트어 아발로키타(Avalokita)와 이스바라(isvara)의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아발로키타(Avalokita)는 관찰한다는 뜻으로서 볼 관(觀) 자로 번역되었고, 이스바라(isvara)는 자유롭게 존재한다는 뜻으로서 스스로 자(自) 자와 있을 재(在) 자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관자재(觀自在)라는 뜻은 세상의 고통을 관찰하는 것이 자유롭다. 라는 뜻이 됩니다.


보살(菩薩)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를 음(音)역한 것인데 보디(bodhi)와 사트바(sattva)의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보디는 깨달음을 뜻하고 사트바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보디사트바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세상의 고통을 관찰하는 것이 자유로운 깨달은 사람

 

행(行)

한자 행할 행(行) 자

행하다. 행동하다. 라는 뜻이 됩니다.

 

심(深)

한자 깊을 심(深) 자

깊다. 라는 뜻이 됩니다.

 

반야바라밀다(般若婆羅密多)

쉽게 말해서 육바라밀 중에서 마지막인 지혜의 바라밀을 반야바라밀다(般若婆羅密多) 라고 말합니다.

 

시(時)

한자 때 시(時) 자로 시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고액 사리자

照見 五蘊皆空 度 一切苦厄 舍利子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가 모두 텅 비어있는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벗어났다. 사리자여.

 

조견(照見)

한자 비출 조(照) 자와 볼 견(見) 자가 합쳐진 것으로 비추어 본다. 라는 뜻입니다.

 

조견(照見)은 관조(觀照)하다는 말과 거의 비슷하게 쓰이는데 불교 사전적인 의미는 지혜로 모든 사물의 참 모습과 나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조견이란 단어는 흔히 들어본 말이라 그 의미는 금방 이해가 되지만 조금 더 구체적 의문을 가지고 보면 설명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고요한 마음은 어떤 것이며, 관찰은 어떻게 하며, 어떤 것이 비추어 보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추상적이고 모호하고 막연한 생각으로 형성된 개념은 전개될수록 진실과 멀어지기 때문에 비록 개인적인 사소한 깨우침일지라도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조견(照見)이 수련 과정에 나타나는 하나의 뚜렷한 현상이라는 것을 알면 수련을 통해 증명도 가능할 것입니다.

 

오온(五蘊)

오온(五蘊)이란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구성 요소를 말합니다. 그 다섯 가지의 구성 요소는 바로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蘊)이란 곧 집합, 구성 요소를 의미하는데, 처음에는 오온이 인간의 구성 요소로 설명되었으나 더 발전하여 현상 세계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통용되었습니다. 오온이 인간의 구성 요소를 의미하는 경우에 ‘색’은 물질 요소로서의 육체를 가리키고, ‘수’는 감정, 감각과 같은 고통, 쾌락의 감수(感受)작용, ‘상’은 심상(心像)을 취하는 취상(取像) 작용으로서 표상(表象), 개념(槪念) 등의 작용을 의미하고, ‘행’은 수, 상, 식 이외의 모든 마음의 작용을 총칭하는 것으로, 그 중에서도 특히 의지작용, 잠재적 형성력(形成力)을 의미하고, ‘식’은 인식 판단의 작용, 또는 인식 주관으로서의 주체적인 마음을 가리킵니다.

 

개(皆)

한자 모두 개(皆) 자로 모두 다, 모든 것을. 이런 말입니다.

 

공(空)

한자의 빌 공(空) 자로 모두 텅 비어 있다는 뜻이지만 이 공자를 이해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반야심경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 공(空) 자에 대한 해석에 있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을 공사상(空思想)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구체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도(度)

한자 법도 도(度) 자로 법도, 제도, 건너가다. 버리다. 라는 뜻이 됩니다.

 

일체(一切)

한자 한일(一) 자와 끊을 절(切) 자로 이루어진 단어인데 모두, 모든 것을 뜻합니다.

‘절’로 읽으면 ‘단칼에 끊다’란 부정적 의미로 쓰이고 ‘체’로 읽으면 ‘모두’ ‘전체’라는 뜻입니다. 이 글자는 일절(一切)이라고 읽으면 안 되고, 일체(一切)라고 읽는 것이 바로 읽는 것입니다.

 

고액(苦厄)

한자 괴로울 고(苦) 자와 재앙 액(厄) 자로 괴로움과 재앙이라는 뜻입니다.

 

사리자(舍利子)

사리자는 부처님 10대 제자 중에서 지혜 제일의 사리불을 말하는 것이고 주로 교화 활동을 하신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반야심경은 입의분(立義分), 파사분(破邪分), 공능분(功能分), 총결분(總結分) 이렇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까지가 입의분(立義分)에 해당하며 입의분은 ‘뜻을 세운다.’는 의미로, 반야심경의 대의(大意)를 간략하게 나타내고 있고, 이 부분에서 반야심경의 핵심적인 사상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이 부분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파사분(破邪分)은 본론 부분으로, 본격적인 부정의 논리를 통해 대승의 공사상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잘못된 집착을 타파해 보이고 있습니다.

 

이 본론, 즉 파사분에서 우린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일체 존재와 불교의 교리, 나아가 사성제와 지혜, 깨달음까지도 모두를 ‘무(無)’로써 타파함으로써 잘못된 집착과 소견들을 하나하나 없애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공능분(功能分)인데, 반야바라밀 수행이 가지는 공능, 즉 반야심경의 가르침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여부여시 사리자(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不如是 舍利子)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니,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판단 또한 그러하다. 사리자여.

 

공사상(空思想)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固定) 불변(不變)하는 실체(實體)가 없다는 것, 이것이 불교의 근본 교리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다른 사물들과 서로 얽혀 관계 속(緣起)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존재이지, 모든 사물이 그 모양이나 형태, 또는 그 성질이 전혀 변치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연에 의해 서로 얽혀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책상을 보고 아이들에게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아이들은 하나같이 책상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책상이라는 것이 본래부터 존재한 것입니까? 책상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몇 개의 나무토막과, 못으로 만들어져 있고 또 그 위에 페인트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책상이 아니고, 나무, 못, 페인트가 합쳐져서 서로 의존하여 책상이라는 형태를 이룰 뿐이지 근본적인 책상이라는 그 본래 자아(自我)는 없다는 것입니다. 책상을 이루고 있는 나무 또한 햇빛과, 물과, 바람 그리고 각종 영양소와 섬유질 등 각종 분자의 결합체로 구성 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무라는 자아(自我)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못도 페인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욱 깊이 들어가면 모든 것이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아(自我)가 없으면 그것이 곧 무아(無我)이고 무아(無我)이니까 바로 공(空)이다 하는 것입니다. 조금은 어렵게 들리시겠지만 앞으로 차츰 공부해 가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이라

여기서 공(空)은“현상계[現象界-사물(事物) 현상(現象)의 세계) 이면(裏面)의 어떤 본체계(그런 것이 있다면)]”를 상정하는 말로 현상계가 본체계와 다르지 않고, 현상계 그대로가 본체계(本體界-현상세계의 근본이 되는 세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공사상은 모든 것이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집착하지 말고 여여(如如)하게 행복하게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여여라는 말보다 우리 불자들에게 더 좋은 말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럼 여여(如如)란 무엇인가?

대중가수 김국환씨가 히트한 ‘타타타’라는 대중가요가 있습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으로

비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그~런거지 음 어~허~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게 덤이잖소

 

이 노래 제목이 바로 ‘타타타’입니다. 그러나 이 ‘타타타’가 ‘여여’란 뜻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여여’란 산스크리트어 타타타(tathata)를 의역한 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철 스님이 게송으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여입니다. 편안하고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러니 많이들 사용하십시오.

타타타(tathata) 다시 말해 여여한 존재가 바로 여래(如來)입니다. 법화경 ‘수량품’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여래여실지견삼계지상(如來如實知見三界之相) 여래는 진실로써 삼계의 상을 알고 보아

무유생사약퇴약출(無有生死若退若出)

생사에 머물지 아니하고 물러가고 나옴도 없으며

역무재세급멸도자(亦無在世及滅度者)

또한 세상에 있지도 멸도 함에도 없느니라

비실비허비여비이(非實非虛非如非異)

실도 아니고 허도 아니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느니

불여삼계견어삼계(不如三界見於三界)

삼계와 같이 삼계를 보지 않느니라.

 

이를 압축해 설명하면 “여실히 삼계의 상을 지견 또는 관찰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실지견(如實知見)이 있는 곳에 해탈이 있다.’하는 것입니다.

여실지견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본다는 뜻입니다. 여실지견의 입장에서 보면 일체법은 유(有)가 아니면서 유이고, 유이면서 유가 아닙니다. 그래서 유에도 주(住)하지 아니하고 무(無)에도 주하지 않는다고 종경록(宗鏡錄)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여기서 색(色)은 물질을 뜻하는 것이고 색(色:물질)이 공(空)하다 하는 것은 물질은 그 자성(自性)이 원래 없고 모두 연기(緣起)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또 자성이라 함은 “늘 그러한 것이라 할 만한 것”을 말하는데 늘 변하기 때문에 “늘 그러한 것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색즉시공이라는 말은 인간을 이루는 물질적 육체적 요소인 인간의 몸이 공하다는 것인데 사람 또한 70%의 물과 단백질, 섬유질, 지방, 각종 미네랄과 원소 등등 굉장히 복잡한 분자들이 서로 얽혀져서 사람이라는 모양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사람이라고 인식 할 진정한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아(自我)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사람이라는 자아(自我)가 없으면 그것이 무아(無我)이고 무아가 바로 공(空)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육체 또한 공인 것이고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우주 만물이 모두 공(空)인 것입니다. (어렵습니까. 그렇다면 이해가 될 때까지 공부해 봅시다.)

이러한 진리(空)를 깨닫게 하는 것이 곧 반야심경의 가르침이고 반야심경의 핵심 사상입니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온(五蘊-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은 몸과 마음입니다. 이때 몸은 색, 수, 상, 행이고 마음은 식입니다. 물질인 몸으로의 색에 대해 수상행으로 이름을 붙여서<규정하여> 각자대로의 몸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명색(名色)입니다. 그리고 행(行)은 마음(식(識)을 만들어 몸과 마음이 함께하여 오온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색(色)은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 물질적인 부분인 몸, 육체를 말하는 것이고,

 

수(受)는 정신적 부분인 느끼는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면 인간이 어떤 사물을 보고 딱딱하다 부드럽다 하고 느끼는 것을 말하고,

상(想)은 예를 들면 인간이 어떤 사물을 보고 좋다 나쁘다 이렇게 생각으로 구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행(行)은 정신적으로 작용하는 것과, 정신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물을 보고 저것을 내가 갖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마음속으로 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식(識)은 정신적으로 식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옆에 누군가 있으면 그 사람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식(識)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색불이공(色不異空)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인데, 위에서 설명한 공사상과 색, 수, 상, 행, 식을 참고하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공이 색과 다르지 않고,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수상행식 여부여시 사리자

受想行識 亦不如是 舍利子

수, 상, 행, 식 또한 모두 그러하니라. 사리자야.

 

역부여시라는 말은 한자의 줄임 말로 수학적으로 말하면 인수분해를 해놓았다고 보면 됩니다. 그것을 줄이기 이전으로 모두 돌려놓으면 이것 수상행식 역시 그렇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다시 정리해 봅시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이요

 

수불이공 공불이수 수즉시공 공즉시수

受不異空 空不異受 受卽是空 空卽是受이고

 

상불이공 공불이상 상즉시공 공즉시상

想不異想 空不異想 想卽是空 空卽是想이요

 

행불이공 공불이행 행즉시공 공즉시행

行不異空 空不異行 行卽是空 空卽是行이고

 

식불이공 공불이식 식즉시공 공즉시식

識不異空 空不異識 識卽是空 空卽是識

입니다.

 

이것을 요약한 것이 바로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입니다.

 

시 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 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이 모든 사물은 그 성질이 공하여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상(空相)

공상(空相)은 공한 모양, 공한 형태다 하는 것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불구부정(不垢不淨)

불구부정(不垢不淨)에서 구(垢)자는 때가 묻어 더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구(不垢)라, 더럽지도 않고, 부정(不淨)이라, 깨끗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공한데 더럽고 깨끗하고 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부증불감(不增不減)

역시 공한 것이기 때문에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판단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생각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생각의 대상도 없다.

 

시고(是故)

시고(是故)는 옳을 시(是) 자와 옛 고(故) 자의 합쳐져서 ‘그러므로’‘이런 까닭으로’라는 것입니다.

 

공중무색(空中無色)

앞에서 색즉시공이라 했으니 공(空) 가운데 색(色)이 있겠습니까. 색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수, 상, 행, 식 또한 없다. 여기 수, 상, 행, 식에 대해서도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습니다.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떤 사물을 대할 때, 육근(六根-눈, 귀, 코, 혀, 몸, 뜻)에 의해서 그 사물을 판단하게 되는데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어떤 사물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무(無)라 했으니 안이비설신의 눈, 귀, 코, 혀, 몸과 생각이 없고,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육근(六根)에 의해서 사물을 인식하게 되면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지각입니다. 쉽게 말하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촉(觸)이라고 합니다. 모든 중생은 육근(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인식하게 되면 반드시 촉(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으로 사물을 판단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리하면 공이기 때문에 빛,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할 수 있는 대상 또한 없다는 것입니다.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시각의 영역도 없고 의식의 영역까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고 또한 어리석음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

 

내지(乃至)란

수량을 나타내는 말 사이에 쓰이는 부사인데 ‘얼마에서 얼마까지’‘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런 뜻입니다.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계에서 무의식계까지

 

여기서는 18계(十八界) 가운데 처음인 눈의 경계와 끝의 의식경계만 들어서 말하고 다른 것은 생략했습니다. 육근으로 인해서 육진[六塵-심성(心性)을 더럽히는 육식(六識)의 대상계(對象界). 곧 육식에서 생기는 ‘빛,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의 여섯 가지 욕정을 통틀어 이르는 것을 말하고, 이것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 육근 청정이라 합니다.]이 생기고 육진으로 인해서 육식[六識-육경(六境)을 지각(知覺)하는 안식(眼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이 생기니 이것을 합치면 18계(十八界)가 되는데 분별을 일으켜 나타내는 것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계(界)라고 하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오면서 망령(妄靈)되어 죄업을 짓고 빛과 소리를 쫓아 자신도 모르게 생각 따라 유전(流轉)하며 중생의 성품이 본래 다르지 않음을 깨닫지 못하고는 다만 능히 생각하기를 진, 근, 식(塵,根,識)을 내지 않고 마음을 없이 하려는데 떨어지므로 이런 말, 즉 내지 의식의 세계조차 없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의 경계도 없고, 귀의 경계도 없고, 코의 경계도 없고, 형의 경계도 없고, 몸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도 없다는 것입니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명도 없고 무명의 다함도 없다. 내지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의 다함도 없다.

 

이 또한 풀이하면 무명(無明)도 없고 무명의 다함도 없다. 행(行)도 없고, 행의 다함도 없다. 식(識)도 없고 식의 다함도 없다. 명색(名色)도 없고 명색의 다함도 없다. 육처(六處)도 없고 육처의 다함도 없다. 촉(觸)도 없고 촉의 다함도 없다. 애(愛)도 없고 애의 다함도 없다. 취(取)도 없고 취의 다함도 없다. 유(有)도 없고 유의 다함도 없다. 생(生)도 없고 생의 다함도 없다. 노사(老死)도 없고 노사의 다함도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그러니까 무명도 없고 무명의 다함도 없다. 내지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의 다함도 없다. 이렇게 간단하게 줄여서 짧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부처님의 12연기법(十二緣起法)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12연기법이란 12가지의 인연을 말하는데, 연기법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이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인연이 되어 저것이 있다.’라는 식으로 인연이 되는 연결고리를 12연기법 이라고 합니다.

12연기법에는 무명, 행, 식, 명색, 육처,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의 12가지 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면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란 무엇인가?

 

무명(無明, avidya: 밝지 않음)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있을 때 눈앞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듯이, 사람의 마음 또한 밝지 않아서 어떤 그릇된 생각을 하고도 그것이 옳은 생각이라고 판단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들을 통 털어서 무명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불교에서는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 무명의 소치, 무지의 소치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모두 여기서의 무명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행(行, samskara): 무명에 의해 그릇된 것을 옳은 것이라고 판단화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이 발생하게 되고, 그렇게 발생한 대상을 실재화, 구체화 하려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행이라 하는 것입니다.

 

식(識, vijnana): 행에 의해 실제화, 구체화 된 대상이 생성되면 그 대상에 대해 무의식적으로나 또는 의식적으로 분별하여 식별하게 됩니다. 그것이 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명색(名色, nam-rupa): 식에 의해 어떤 대상을 분별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인식에 의해 그것이 물질적 존재인지 비물질적 존재인지의 여부를 판단하게 됩니다. 그것을 명색이라고 합니다.

 

육처(六處, sad-ayatana): 명색에 의해 어떤 대상을 물질적 존재인지 비물질적 존재인지 판단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눈, 귀, 코, 혀, 몸, 뜻에 의해 새롭게 그 대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 육처가 바로 육근인데 앞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촉(觸, samsparsa): 촉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 드렸습니다만 다시 말하면 육처에 의해서 그 사물을 인식하게 되면 색, 성, 향, 미,촉, 법이 발생하는데 그것을 해석하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지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受, vedana): 촉에 의해서 어떤 사물의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이 발생하게 되어 그것을 느끼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한 고(苦-괴로움), 락(樂-즐거움), 불고불락(不苦不樂-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의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 이상의 느낌이나 감정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수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대상에는 언제나 괴로움, 즐거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세 가지 감정 중에 한 가지 이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愛, trsna): 수에 의해서 괴로움, 즐거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세 가지 감정 중에 어느 한 가지의 감정이 발생하게 되면, 모든 중생들은 그 세 가지 감정 중에 즐거움을 줄 수 잇는 대상만을 끝없는 갈구(渴求)하고 갈애(渴愛)하고 그 대상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됩니다. 그 대상이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맹목적인 사랑을 쏟아 부울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애(愛)입니다. 여기서 애는 자비와 같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취(取, upadana): 애(愛)에 의하여 그 어떤 대상에게 사랑을 쏟아 부었을 때 그 대상이 자신에게 즐거움의 대상이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추구된 즐거움의 대상을 자기가 소유하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그것을 취득하여 병합하는 작용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취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有, bhava): 취에 의해서 즐거움의 대상을 취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그리하여 대상을 결국 자신이 소유하게 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유(有)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유(有)라는 글자에 포함된 뜻은 있다(be)와 된다(become)의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대상인 어떤 물질을 소유하게 되면 ‘있다, 없다’ 중에 있다가 되겠지만 그 대상이 어떤 물질이 아니고 생각이나 느낌이 나면 그것을 소유하게 되면 ‘된다, 안 된다’ 중에 ‘된다.’가 되는 것입니다. 생사(生死)하는 모든 존재(存在)는 그 자체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이런 식으로 형성된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노사(老死, jara-marana): 생(生)에 의해서 그 대상이 태어나게 되면 그 대상이 그 무엇이든 간에 결국 늙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노사입니다. 이 노사라는 것은 단순하게 사람의 육체가 늙고 죽는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자기 자신이 태어나고, 또 늙고 죽는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생각만으로도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그렇게 발생한 괴로움을 불교에서는 괴로움이 태어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괴로움조차도 그렇게 태어난 괴로움이기 때문에 그 괴로움도 반드시 늙고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생각이 발생했다가 사라지는 것 그 자체를 불교에서는 태어났다가 늙고 죽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12연기법 설명은 이것으로 마치고)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이라는 말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이 엄청난 12연기법이라는 것조차 반야심경에서는 모두 없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반야심경은 부처님 말씀을 모두 틀렸다고 부정하는 경전입니다. 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반야심경은 정말로 무서운 경전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12연기법을 ‘없다’라고 말하는 반야심경의 내용대로라면 어쩌면 그것을 깨닫고 설파하신 부처님 자체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부처님이 없습니까? 있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있습니다. 있다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공부하는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 고 보리살타 의 반야바라밀다 고 심무가애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 故 菩提薩埵 依 般若婆羅密多 故 心無罣碍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없어짐,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또한 얻는 것도 없다.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다.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무고집멸도 라는 말은 고, 집, 멸, 도가 없다는 뜻인데 이 말은 부처님이 설하신 불교의 사성제 또한 전부 없다. 라고 부처님이 설파하신 사성제를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성제(四聖諦)란 산스크리트어 카투라-아르야-사티야(catur-arya-satya)를 그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 괴로움(苦), 괴로움이 모인 집(集), 괴로움이 사라진 멸(滅),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길인 도(道) 이 네 가지를 곧 사성제(四聖諦)라 하는 것입니다.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아는 것도 없고, 또 얻는 것도 없다. 바꿔 말해서 지혜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그래서 아무런 소득도 없다, 얻은 것이 없다.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라는 이무소득고는 바로 모든 부정의 논리인 파사분(破邪分)을 전체적으로 덮고 잇는 가장 중요한 핵심의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파사(破邪)란, 말 그대로 ‘삿된 것을 깬다.’는 말로서, 즉 우리가 고정된 실체가 없는 모든 대상에 대해,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것에 집착하는 삿된 소견을 타파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파사분에서는 일체 현상계의 존재인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부정하였고, 이어서 현상계의 조견을 통해 보았던 진리의 모습인 사성제와 십이연기도 부정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또한, 결국에 가서는 이 모든 부정의 논리의 궁극적 모습인 지혜와 깨달음마저도 부정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없다’라고만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바로 이 부분 이무소득고를 설하신 연유입니다. 다시 말해, ‘일체의 모두가 붙잡을 것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착을 놓으라는 것입니다.

현상계도 없고, 진리의 모습 또한 없고,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와 깨달음 그 자체도 없다는 것은 일체를 붙잡고 구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 ‘이무소득’이라는 것이 반야심경의 의미상 핵심을 이루는 단어입니다. ‘얻을 것이 없는’ 이유는 일체가 공이기 때문입니다.

 

보리살타(菩提薩埵)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를 한문으로 번역할 때 소리 나는 대로 번역하였는데 그것이 보리살타이다.

 

보리살타라는 단어는 bodhi(보디-깨달음)와 sattva(사트바-사람)가 합쳐진 것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본래 석가모니가 성도(成道)하기 이전에 보리살타였고 그것을 줄여서 보살(菩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依)란

의지하다. 의지하여. 이런 뜻이고.

 

반야바라밀다(般若婆羅密多)

참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르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하고 육바라밀 중에서 지혜의 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이것은 글의 첫 머리에 이미 설명 하였습니다.

심무가애(心無罣碍)

마음 심(心), 없을 무(無), 거리낄 괘(罣-거리낄 가), 거리낄 애(碍)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 반야바라밀다 고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究竟涅槃

三世諸佛 依 般若婆羅密多 故得 阿耨多羅三邈三菩提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다.

 

무가애고(無罣碍故)

없을 무, 거리낄 가. 거리낄 애, 연고 고,

거리낌이 없으므로

 

무유공포(無有恐怖)

없을 무, 있을 유와 공포의 합성어

공포가 있을 수 없다.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멀 원, 이별할 리, 뒤집어질 전, 뒤집어질 도, 꿈 몽, 생각 상.

원리전도몽상이란 뒤집어진 꿈같은 생각을 멀리 이별하라는 것입니다. 반야, 즉 공(空)에 의지해서 전도몽상에서 멀리 떠나라는 것인데 전도몽상의 종류가 크게 네 가지라고 열반경에 나옵니다.

첫째.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여기는 것.

둘째. 고통인 것을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

셋째. 무아인데 내가 있다고 여기는 것.

넷째. 더러운 것을 깨끗한 것으로 여기는 것.

 

구경열반(究竟涅槃)이란

깨침의 최상의 극치에 도달한 가장 수승(殊勝)한 열반을 말하는 것인데 구경(究竟)은 최상(最上), 구극(究極), 필경(畢竟) 이런 뜻입니다.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최고의 목표는,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젊은 사문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신 것처럼, 그와 똑 같은 열반, 해탈을 증득(證得)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 수행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이익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이 구경열반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들.

과거, 현재, 미래 이 세 가지를 삼세라고 하는 것이고 삼세제불이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이라는 뜻입니다.

 

의(依)란

의지하다. 의지하여. 이런 뜻이고.

 

반야바라밀다(般若婆羅密多)

대 지혜의 바라밀, 참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르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하고 육바라밀 중에서 지혜의 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글의 첫 머리에 이미 설명 하였습니다.

 

고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得 阿褥多羅三邈三菩提

무상정등각을 얻게 된 연유(緣由)이다.

 

고득(故得)

故: 연고(緣故), 사유(事由), 까닭, 이유(理由)

得: 얻다, 깨닫다, 알다, 이르다, 도달하다

이러한 연고로 얻었느니라. 무엇을 얻었는가!

 

아뇩다라는 부처님의 올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의 지혜(최상의 지혜)를 뜻하는 것으로 무상(無上), 삼약삼보리는 정등각(正等覺)의 뜻이므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 번역됨.

 

산스크리트어 아누타라(anuttar; 무상(더할 나위 없이 높은), 삼약(samyak; 정등(가장 올바른, 완전무결한), 삼보디(sambodhi; 정각(궁극적인 깨달음)를 소리 나는 대로 음역(音譯)한 것입니다.

 

부처가 깨달은 모든 진리를 가리키며, ‘바른 평등’ 또는 ‘원만’이라는 뜻으로 아루보리(아뇩보리)라고도 합니다.

보리란 부처·성문(聲聞)·연각(緣覺)이 각각 그 과보에 따라 얻는 깨달음을 말합니다.

곧 부처의 깨달음은 더 이상 위가 있을 수 없는 최상이며, 바르고 평등하며 완벽하다는 뜻입니다.

부처가 아니라도 깨달음은 있을 수 있으나 무상정등각은 오로지 부처의 깨달음만을 뜻하므로 비교할 대상도 없습니다.

《아미타경》 후반부에 나오는 용어인데, 다른 모든 부처가 아미타불을 위로하기 위해 사바세계와 오탁(五濁) 속에서도 무상정등각을 얻어 중생들에게 법을 설했다 합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적으로 풀이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피안의 세계, 최고로 행복한 세계, 가장 높은 이상의 세계, 일체 중생이 염원하는 가장 복되고 성스러운 세계라 할 것입니다.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知 般若婆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그러므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능히 온갖 괴로움을 없애주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

 

고지(故知)란 고(故)로 알아라.

그러므로 알아라. 이런 말입니다.


반야바라밀다(般若婆羅密多)

지혜의 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앞 첫 머리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반야바라밀다는 크게 신비한 주문이요(是大神呪), 밝은 주문이며(是大明呪), 더 이상 비할 데 없는 높은 주문(是無上呪 是無等等呪)이라는 뜻

 

여기서 말하는 주문은 마술사가 마술을 부릴 때 중얼거리는 주문이 아니라 지혜의 완성을 의미하는 ‘반야바라밀’은, 일반적인 언어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최고, 최상의 것이기 때문에 주문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의 수행은 너무나도 깊고 오묘해서 하나의 주문으로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진언(眞言)은 경전에 많이 나옵니다.

진언 중에도 짤막한 진언은 종자(種子)라고 하고 조금 긴 것은 그냥 진언이라고 하고 또 뜻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해서 다라니라고도 합니다.

 

경에 보면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대명주(大明呪)를 외우면 스스로 몸에 괴로움이 없고 또한 남도 괴로움이 없고 둘이 다 편안 하느니라. 왜냐하면 대명주(大明呪)며 무상주(無上呪)이기 때문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명주(明呪)는 모든 복덕, 지혜 및 모든 행의 근본이라 하여 입으로 부르면 공덕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써서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집에 두어도 생사(生死)의 세계에서 해탈하는 인(因)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

능할 능, 제거할 제 와 일체, 그리고 괴로울 고 자인데, 능히 일체의 괴로움을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불허(眞實不虛)

참 진, 열매 실, 아닐 불, 허망할 허,

이 가르침은 진실하기 때문에 허망하지 않다는 것이다.

 

텅 비어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는 이 반야의 도리는 위대한 주문인 까닭에 일체의 고통과 불행의 문제들을 다 소멸하고 이 도리는 참으로 진실하기 때문에 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래 텅 비어 있기 때문에 허망할 까닭도 없고 진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앞의 “조견오온개공”으로 시작해서 “도일체고액”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즉 반야심경의 총결 부분입니다. 지혜의 완성은 능히 일체의 괴로움을 제거하고 진실해서 헛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어떤 문제라도 지혜의 완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능히 일체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지혜의 완성을 “진실불허”의 대목에서는 믿음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진실 되어 헛되지 않는 경지는 믿음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 속에는 실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완성은 방편의 도리가 아니라 공의 도리를 밝힌 것이기 때문에 진실하여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맨 앞에서 관자재보살이 일체의 고통을 건넌 경지를 설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구절로 능히 일체의 고통을 제거하는 경지에 도달케 함으로써 지혜의 완성을 마무리 짓고 있는 것입니다.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故說 般若婆羅密多呪 卽說呪曰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이르노니,

주문은 바로 이러 하느니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테 가테 바라가테 바라삼 가테 보디 스바하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가자 가자 건너가자 넘어서 건너가자 모든 것을 넘어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자 그 곳에서 깨달음을 얻으리라.

 

우선 여기에 등장하는 주(呪)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주’는 자신과 타인의 재액(災厄)을 없애거나, 혹은, 적에게 재액을 주기 위해 외우는 주문이란 의미로 보통 사용하는데, 전자를 선주(善呪), 후자를 악주(惡呪)라 한다고 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주문(呪文), 신주(神呪), 금주(禁呪), 밀주(密呪)라고도 합니다. ‘주’는 보통 범어 ‘만트라(mantra)'의 번역으로 보는데,혹은 ’다라니(dharani)', '비디야(vidya)'의 번역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편, 만트라(曼陀羅)를 밀주(密呪), 다라니(陀羅尼)를 총지주(總持呪), 비디야를 명주(明呪)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주’를 외우는 것은 인도에서 옛부터 있었던 전승으로 추측되며, 불교 경전에도 종종 ‘주’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술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고, 특별히 수행상 일신(一身)의 보호를 위해서 약간의 주에 의지하는 행위를 묵인하셨다고 경전에서는 말합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어느 정도 세속의 신앙에 대해 유화적이고 포용력 있는 자세를 견지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유화적인 태도로 인해 이후에 밀교가 생겨날 즈음에는 주(呪)가, 다라니, 만트라, 진언이란 이름으로 불교 수행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반야심경에 대하여 설명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