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광사 소개

광사는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구성이 모두 포함된 절입니다. 

사찰 내부에는 1984년 건립한 목조 건물인 관음전과 1995년 석조로 조성한 미륵불, 그리고 근래에 조성한 와불전과 요사 등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관음전 앞에는 5층 석탑이 있으며, 2002년 사찰 내에 사리를 모셔두는 사리박물관을 개관하였습니다.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 있는 대한 불교 태고종 소속 사찰.
개설
서광사는 1947년 고암스님이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법화종 소속 사찰이었으나,
1970년 태고종으로 종단을 변경하였다. 서광사의 신도 수는 1,000여 명이다.
현황
2018년 현재 서광사에는 1985년 건립한 목조의 관음전(觀音展)과 1995년 8월에 조성한 석조의 미륵불, 근래 조성한 와불전(臥佛展), 콘크리트 구조의 요사가 있다. 또한 관음전의 전면에는 1994년 조성한 5층 석탑이 있으며, 2002년 10월 개관하여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와 그 10대 제자의 사리, 국내외 고승의 사리를 전시·소장하고 있는 서광사 사리 박물관이 있다. 신도회와 현재 주지인 [경봉(鏡峯), 지환(智幻)]스님을 중심으로 인천 교도소 교화 활동을 하고 있다.


☸ 사리박물관

물관 안에는 석가모니 진신사리와 그 10대 제자의 사리, 국내·외 고승으로 잘 알려진 불자들의 사리 수천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리 대부분은 서광사 주지인 지환 스님이 직접 미얀마 곳곳을 찾아다니며 국내로 들여온 것들이며

이 중에는 미얀마에서 수행하던 고(故) 두이아 스님이 오랜 세월 모셔온 것들도 많습니다.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의 서광사 안에 있는 박물관.
건립 경위
누구나 쉽게 사리를 보고 접하며 불심을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해 부처와 제자들의 사리와 사리 장엄구를 전시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변천
2002년 10월 16일 개관한 박물관으로, 전시·소장된 사리는 서광사 주지인 김영웅[경봉(鏡峯), 지환(智幻)]이 미얀마에서 국내로 들여온 것들이다.
현황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와 그 10대 제자의 사리, 국외 고승의 사리 등이 소장·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의 소장품들은 석가모니의 정골·눈·뼈 등에서 나온 사리, 석가모니 10대 제자의 사리, 아라한의 뼈 사리,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나무 아래의 흙 등이다. 연중무휴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지속된 사리증식의 가피로 현재에 이르렀다.



☸ 사리란?

인도말로서 신골(身骨), 유신(遺身), 영골(骨)이라 번역된다. 본래는 신골이나 주검을 모두 사리라 하였는데, 후세에는 화장한 뒤에 나온 작은 구슬 모양으로 된 것만을 이르게 되었다. 이 사리는 한량없는 육바라밀 공덕과 계정혜를 수행하여 생기는 것으로 매우 얻기 어렵고, 제일가는 복전(福田)이 된다.

사리는 진신사리, 쇄신사리, 생신사리, 법신사리로 구별하 는데, 이 중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와 같은 몸에서 나온 낱알로 된 쇄신사리, 또 대·소승의 일체 부처님 말씀을 담은 경전을 법신사리라고 한다.


☸ 사리박물관 소개

현재 문학산 서광사 사리박물관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 사리와 아라한 사리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일가 (Relative of Buddha)가 살았던 타키원(TharKi Win)나라에 잦은 기근과 전쟁으로 인하여 나라는 피폐해지고, 사람들은 점점 살기 힘들어지자 부처님 일가가 부처님 사리와 아라한 사리. 일반 스님 및 사람들을 데리고 현재의 미얀마 지역(이 시대에는 인도)으로 와서 '데까웅(Ta Gang)'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 '데까웅'이라는 나라가 현재의 미얀마(버마)라는 나라입니다.

이때부터 불교의 나라 미얀마가 시작되었고, 부처님에 대한 불심으로 많은 파고다를 세울 적마다 왕이 직접 소유하던 금은보화와 부처님사리를 함께 봉안하였습니다. 지금도 무수히 많은 파고다들이 미얀마의 만달레이 근처와 그 정글 속에 집중되어있는 것은 부처님 일가가 세운 나라가 이 근처이기 때문입니다.


- 현재 서광사 부처님 사리

현재 서광사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사리와 아라한 사리는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에 자연재해와 잦은 전쟁으로 인하여 관리 소홀로 부서지고 무너지는 파고다를 안타깝게 여기시던 '두이아' 스님께서 오랜 세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모셔 왔던 부처님사리와 아라한 사리들입니다.

특히, 옛날 바간왕들이 많은 파고다를 세웠던 '샨'지역의 '꾸메(Kumae)'에서 오랜 세월 개보수를 하지 않아 무너진 파고다에서 일반인들이 파고다를 헤집으며 그 속에서 각종 금은보화를 가져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부처님사리를 보호하고자 그곳에 가서 그 지역의 각 스님들께 선물 을 주고 부처님 유물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또 다른 부처님 머리카락과 사리는 '민자'에서 모셔 왔는데 파고다 곁으로 흐르는 큰 강이 흐르고 있는 바, 우기 때마다 조금씩 무너지던 강둑이 급기야 파고다가 있는 곳까지 와서 파고다들이 무너지자 파고다를 옮기는 작업 중에 발견하여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 아라한 사리

몇백년전 '민자'에 있는 '조티가요(Zawtigayon)' 사찰에서 수행하시던 한 스님이 부처님 일가와 함께 미얀마(버마)지역으로 건너왔던 아라한들이 '데까웅'의 킨데(Khin Le) 산에 묻힌 것을 알고 발굴하여 모셔놓았던 것을 '두이아'스님께서 다시 '메틸라' 시에 있던 스님 사찰에 모셔왔던 사리입니다.


- 분신사리(分身舍利)

사리의 진위여부는 세 가지 방법에 의해 가리는데 첫째, 사리가 증식하는가? 둘째, 물에 닿았을 때 움직임이 있는가? 셋째, 방광(放光) 현상이 일어나는가?로 가립니다.

서광사에 모셔온 사리들도 증식의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고 몇몇 인연이 닿은 분들께서 모셔간 사리 또한 서서히 증식의 과정을 보였습니 다. 증식이 있으면 반대로 소멸의 과정 또한 있기 마련인데, 실례로 신심이나 수행이 낮은 스님 이나 제자들이 모셔갔을 경우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가 있었습니다. 빛이 나는 경우는 아직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만 부처님 머리카락 사리를 모시고 접시에 물을 담아 띄웠더니 움직이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YTN에서 방영한 영상이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인터넷에 '움직이는 두발'을 찾으시면 됩니다.

사리란 본래 몸을 가리키는 산스크리트어 사리라(Shariria)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대로 음역해서 설리라(設利羅), 또는 뜻을 옮겨 영골(靈晉)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입멸하시자 그 유골을 8등분하여 각지에 탑을 세워 그 속에 안치했는데, 이것이 불탑의 시초입니다. 나중에 아쇼카 왕은 8개의 탑 중 7개의 탑으로부터 유골을 모두 모아 다시 세분하여 8만 4,000개의 탑을 인도 각지에 건립했다고 합니다.


이런 전통에 연유하여 사리를 숭배하고 공양하는 신앙이 사리탑을 건립하는 등의 형태로 아시 아의 불교국에서 널리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금광명경에서는 "사리는 계정혜(戒定慧)를 닦은데서 나오므로 보기 드물고, 사리를 얻는 것은 상등의 복전(福田)을 얻은 것”이라고 하고 있습 니다. 본래는 신체를 뜻하였으나 후에는 불타(佛陀)와 고승(高僧)등의 시신(屍身)을 뜻하게 되었 습니다. 사리는 다비(茶毘:火葬)하기 전의 전신사리(全身舍利)와 다비 후의 쇄신사리(碎身舍利) 로 분류하였는데, 보통은 후자를 가리키며 다투 (dhatu:馱都) 또는 생신(生身)이라 부르기도 합 니다.

일반적으로 사리 공양은 천계(天界)에 태어나는 과보(果報)를 얻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불상이 출현하기 이전에, 금강좌(金剛座:싯타르타가 성도할 때 앉아서 참선하던 자리), 보리수(금강좌 옆에 서 있던 보리수), 법륜(法輪)등과 함께, 불타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 중요한 예배 대상이 되었던 점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부처님 사후 유언에 따라 500년 간 불상이나 전각이 없이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을 중심으로 신앙이 발전하였고, 그 사리를 보관하던 곳이 바로 탑입니다.

절에 가면 전각과 전각 안의 불상, 그리고 탑으로 구성되는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삼국시대 에 불교가 처음 전파되었을 때는 탑을 중심으로 전각은 그리 중요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절에 탑이 하나 있고 금당이 하나 배치되는 1탑 1금당 형식의 가람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의 사리를 대신 할 수 있는 불상을 모시게 된 것입니다.


불상을 모시기 위해서는 전각이 있어야겠지요? 

그래서 그다음부터 전각 안에 부처님 모시는 형태로 바뀌면서 차츰 탑의 중요성이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불사리를 모시고 온 시기는 신라 진흥왕 10년(549)에 각덕(覺德)스님이 양(梁)나라 사신 심호(沈湖)와 더불어 귀국할 때 모시 고 온 것에서 비롯하는데, 이때 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흥륜사(興輪寺)의 앞길에서 봉영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진흥왕 27년에 또 중국에 유학승 안홍 법사가 호승(胡僧)비마라와 함께 불사리를 모시고 돌아왔으며, 이보다 훨씬 후 문성왕 13년 (851)에는 입당사(入唐使) 원홍(元弘)스님이 불경과 불아(佛牙)를 모시고 온 일이 있으나, 신라가 삼국통일의 시련을 겪어가는 위기의 선덕 여왕 때 자장율사가 모시고 온 불사리는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받은 진신사리(眞身舍利)라 믿어 우리나라 불사리 중에서도 가장 신성한 것으로 숭배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처님의 사리와 정골(正骨)을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습니다. 경남 양산 통도사,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가 그것입니다.

적멸보궁에서는 법당 내에 불상을 모시는 대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거나 또는 사리탑을 봉안하거나 계단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보궁의 기원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의 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를 열었던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서 비롯됩니다.

흔히 사리의 양과 수행의 정도가 비례한다고 믿는 것은, 사리가 한량없는 육바라밀의 공덕에서 생기며 매우 어렵고 으뜸인 복전이라고 설한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유래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리를 경배하는 것은 구슬의 가치나 성분이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의 지극한 불심 입니다. 그저 사리의 개수를 따져 대덕의 법력을 가늠하고자 하는 것은 경솔하며 당연히 경계해야 합니다.